[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2편, 창조 셋째 날 '반 때' ... "씨"가 그 중심에 서다
'반 때'란 무엇인가창세기를 읽다 보면 우리는 1장과 2장 사이, 시간의 간격이 어긋나 있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성경은 이 '반 때'에 대한 사례들이 많다. 요한계시록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합하여 삼 년 반)가 그 대표적인 예다.이 칼럼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시작해 마태복음의 족보, 누가복음의 무화과나무 비유, 요한계시록의 광야 이야기까지를 하나의 실로 꿰어, 이 '반 때'라는 시간의 결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살펴보려 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씨'가 있다.창세기 1장과 2장 사이, 보이지 않는 간격창세기 1장 셋째 날, 하나님은 명하신다."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세기 1:11)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 창조 셋째 날은 어떤 '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분명 셋째 날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할 그 장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창세기 2:5)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다. 밭에는 채소가 "아직" 나지 않았다. 창세기 1장에서 셋째 날에 "그대로 되었다"고 선언된 것이, 2장에서는 "아직"이라는 말로 유보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의 간격을, 성경은 두 가지 이유로 짚어 준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비는 자주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가리키는 은유로 쓰인다. 단비처럼 내리는 가르침 없이는 씨가 자랄 수 없다. 그리고 그 '씨'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누가복음 8:11)씨는 심겨졌지만 밭을 가는 사람도 없고, 땅에 내리는 단 비도 없어, 씨는 자라나지 못한 채 멈춰 있다. 창조는 완성되었지만, 그 창조가 씨가 들과 밭에 뿌려져 열매로 회복되는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셋째 날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간격, '씨'는 놓였지만 아직 결실로 이어지지 않은 이 '반 때'는 이후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패턴이 된다.셋째 날 반 때, '씨', '밭', '채소', '과목'은 천국 비유창조 셋째 날 '반 때"부터 나오는 씨, 밭, 채소, 과목 등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천국에 비유했다."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그리고 그것은 예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 3:22)공중의 새들이 예수라는 나무 가지에 깃든다. 그 중심에는 '씨(하나님 말씀)'가 있다.예수 그리스도 족보 속에 감추어진 '반 때'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 족보는 이 패턴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 준다."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 1:17)14대, 14대, 14대. 겉으로는 마흔두 대가 가지런히 세 묶음으로 나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2절부터 16절까지 이름을 하나씩 세어 보면, 마지막 세 번째 묶음은 다른 두 묶음과 달리 온전한 열넷을 채우지 못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다.겉모습은 완전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마지막 한 칸이 비어 있는 셈이다. 이는 창세기 2장의 "아직"과 같은 구조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실제로는 채워지지 않은 반 칸, 곧 '반 때'가 숨어 있다. 그 빈 시기는 공교롭게도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곧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침묵 속에 놓여 있던 시대와 맞물린다. 창세기에서 씨가 심긴 채 자라지 못했던 그 정지의 시간이, 족보 위에서는 비어 있는 한 칸으로 다시 나타나는 셈이다.삼 년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그리고 '반 때'를 더 구하는 청지기누가복음의 비유는 이 '반 때'의 의미를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누가복음 13:7)주인은 삼 년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려 한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답한다."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누가복음 13:8)여기서 놓치기 쉬운 사실 하나가 있다. 무화과나무는 본래 한 해에 두 번, 곧 봄 무화과와 여름 무화과를 맺을 수 있는 나무다. 예수가 다른 곳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며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여름 무화과, 곧 한 해의 나머지 절반을 가리킨다.그렇다면 포도원지기가 구하는 "금년"은 이미 다 지나가 버린 한 해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는 반 때, 곧 여름 무화과가 맺힐 그 시간이다. 삼 년의 기다림 끝에, 나무에게 다시 반 때가 허락된 것이다.광야의 여자와 한 때, 두 때, 반 때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시간의 단위가 다시 나타난다."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요한계시록 12:14)한 때, 두 때, 반 때를 합하면 삼 년 반이다. 광야로 쫓겨간 여자가 보호받는 이 기간은, 앞서 살펴본 무화과나무에게 더 허락된 삼 년과 반 때의 패턴과 정확히 겹친다.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그림이 겹쳐 보인다. 창세기 2장의 유보된 씨앗, 마태복음 족보의 비어 있는 반 칸, 무화과나무에게 더 허락된 한 해의 절반, 그리고 광야에서 여자가 보호받는 삼 년 반. 시대도 다르고 등장인물도 다르지만, 이 네 장면은 같은 하나의 리듬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다. 완성처럼 보이던 시간 속에 감추어진 '반 때'의 간격, 그리고 그 간격이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씨를 가지고 밭을 가는 사람, 마침내 오다그렇다면 창세기 2장이 말한 두 가지 결핍, 곧 '비'와 '땅을 갈 사람'은 언제, 어떻게 채워지는가. 예수는 천국을 이렇게 비유한다."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태복음 13:3)창세기 1장에서 심기고 2장에서 아직 자라지 못한 채 멈춰 있던 그 씨앗이, 마침내 뿌려지고 자라나 결실을 맺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밭을 가는 이가 누구인지, 예수는 스스로 밝힌다."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한복음 15:1)땅을 갈 사람이 없어 초목이 자라지 못했던 그 자리에, 이제 참 농부이신 아버지와 참 포도나무이신 아들이 함께 서 계신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씨"는 하나님 말씀이요, 마르고 황폐한 밭에 마침내 그 생명을 품은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하나님 교훈이 단비 같이 내린 뒤, 밭을 가는 이가 오신 것이다.셋째 날 심긴 씨앗은 결코 잊힌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씨앗이 자라날 반 때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밭을 갈 준비하고 계셨을 뿐이다.나가며, 다시 열리는 '반 때'창조의 셋째 날부터 요한계시록의 광야까지, 성경은 반복해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반 때'를 보여 주고, 그 반 때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을 예비해 왔다. 열매 없는 삼 년 뒤에 더해진 한 해의 절반처럼, 침묵의 시대 뒤에 감추어진 족보의 반 칸처럼, 광야에서 보호받는 삼 년 반처럼. 하나님은 결핍의 시간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그 반 때를 다시 채울 농부를 그 땅에 보내신다.천국을 회복하기 위한 셋째 날의 씨는 마침내 이 땅에 뿌려졌다. *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