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부, 1000조 '녹색대전환'…탄소값은 여전히 그대로
[데일리환경=이정윤 기자]기후에너지환경부가 2026년부터 2035년까지 1000조 원을 쏟아붓는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내놓았다. 산업의 탄소중립과 성장을 동시에 꾀한다는 구상이지만, 정작 녹색전환의 핵심 신호인 탄소배출권 가격은 이번 발표에서도 손대지 않았다. 지원은 커졌는데 규제는 그대로라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온다. 기후에너지환경부, 2026.10.7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K-GX 전략을 공개했다. 김성환 장관이 직접 발표한 이 전략은 2026~2035년 재정 200조 원, 기후금융 79조 원 이상을 포함해 총 1000조 원 규모의 자금을 동원하겠다는 계획이다. 2018년 대비 2035년 부문별 감축률은 에너지 68.8~75.3%, 산업 24.3~31.0%, 수송 60.2~62.8%로 제시됐다. 태양광·소형모듈원전(SMR) 확대, 수소환원제철 등 철강 탈탄소, 내연기관차의 전기차 전환, 가정용 히트펌프 보급이 핵심 수단으로 꼽혔다. 철강·석유화학·정유·시멘트·반도체·디스플레이 등 6대 다배출 업종의 탈탄소 로드맵은 연말까지 내놓기로 했다.이번 발표를 과거와 비교하면 '판'은 커졌지만 '틀'은 거의 그대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해 12월 2026년 업무계획에서 이미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53~61% 감축)와 100GW 재생에너지, 2040년 석탄발전 전면 폐지, 유상할당 확대 등을 제시했다. 올해 1월 업무계획에서도 K-GX 추진단 발족,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 탄소중립산업법 제정 추진 등 거의 동일한 항목이 되풀이됐다. 이번 10월 발표는 이 구상들을 '1000조 원'이라는 숫자로 묶어 재포장한 성격이 짙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문제는 과거 정책이 막지 못한 지점이 이번에도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다. 경향신문(2026.10.7 보도)에 따르면 기후단체 '플랜 1.5'는 K-GX가 지원 위주 대책에 그쳐 "탄소배출권 가격 정상화와 유상할당 전환이 산업 탈탄소의 전제조건"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배출권 가격은 톤당 약 2만9550원으로, 한국은행이 203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에 필요하다고 추산한 톤당 약 20만 원(150달러 안팎)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가격이 낮으면 기업이 감축에 투자할 유인이 그만큼 약해진다. 플랜 1.5는 또 기후대응기금 확대의 주요 재원이 유상할당 수입인데, 실제 유상할당 비율은 11%에 그친다고 짚었다. 녹색전환연구소 김병권 연구위원도 "중국이 주도하는 녹색산업 경쟁에서 경쟁력을 되찾기엔 수단이 부족하다"며, 반도체 공장·AI 데이터센터 등 이른바 '3대 메가 프로젝트'가 화석연료 발전에 크게 의존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이에 대한 녹색 전략이 빠졌다고 지적했다.이런 비판은 낯설지 않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서 한국은 67개국 중 63위에 머물렀고, 평가기관들은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제4차 배출권 할당계획이 파리협정 1.5도 경로와 "실질적으로 불합치"한다고 평가했다.즉 한국의 기후정책은 목표 수치만 계속 상향되고, 가격·할당 같은 규제 수단은 수년째 제자리에 머무르는 패턴이 반복돼 왔다. 이번 K-GX 전략이 과거 정책의 실패 지점—낮은 탄소가격, 저조한 유상할당률—을 보완했는지 따져보면, 재정 투입 규모만 커졌을 뿐 가격·할당 체계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은 "연말까지 마련"이라는 미래형 문구로 남겨둔 채다.물론 정부도 할 말은 있다. 4차 배출권거래제 계획기간(2026~2030) 배출권 할당은 이미 완료됐고, 산업 부문 유상할당을 10%에서 15%로, 발전 부문은 50%까지 단계적으로 올리는 방안이 연내 확정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이 역시 '올해 안에 확정'이라는 예고 단계이지, K-GX 발표 시점에 함께 못박힌 확정 수치는 아니다.지원 중심 설계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1000조 원 가운데 재정 투입분은 200조 원, 나머지 800조 원 가까이는 민간·금융권의 투자를 유도하는 간접 재원으로 채워진다. 정부가 직접 쓸 수 있는 돈보다 '유도해야 할' 돈이 네 배 가까이 많다는 뜻이다. 보조금과 세제 지원으로 기업의 전환 비용을 낮춰주되, 전환하지 않을 때 드는 비용—즉 탄소가격—은 그대로 낮게 둔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보조금만 받고 기존 설비를 더 오래 쓰는 쪽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바로 이런 구조에서 나온다. 실제로 산업 부문 감축 목표치(24.3~31.0%)는 에너지·수송 부문보다 낮게 잡혀,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업종일수록 감축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큰 그림의 숫자는 매 발표마다 갱신되지만, 그 숫자를 뒷받침할 구체적 실행 계획은 번번이 '연내 확정'이나 '추가 검토'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음 발표로 넘겨지는 흐름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2035 NDC 수치 자체도 애초 2025년 2월 발표 예정이었다가 대선과 정부 교체를 거치며 한 해 가까이 늦춰진 끝에야 확정된 전례가 있다. 목표를 세우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린 정부가, 그 목표를 뒷받침할 가격·할당 체계는 몇 달 안에 바꿔낼 수 있을지는 더 지켜볼 문제다.앞으로 지켜봐야 할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연말로 예고된 6대 업종 탈탄소 로드맵과 유상할당 비율 상향이 실제 수치로 확정되는지. 둘째, 탄소배출권 가격이 한국은행이 제시한 목표 수준에 근접하도록 설계되는지, 아니면 또다시 '시장 안정화'라는 명분으로 낮게 묶이는지. 셋째, 반도체·AI 데이터센터처럼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신산업에 대한 녹색 전환 전략이 이번 1000조 계획 안에 구체적으로 편입되는지다. 숫자가 커지는 것과 실제 감축이 이뤄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을, 정부 스스로도 곧 증명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