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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욱의 종교 칼럼] 선악과에 대한 역사적 논쟁과 '예수'와 '임마누엘'  두 이름을 따라가는 생명나무를 향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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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욱의 종교 칼럼] 선악과에 대한 역사적 논쟁과 '예수'와 '임마누엘' 두 이름을 따라가는 생명나무를 향한 여정

    칼럼에 들어가며"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9)는 창세기 첫 페이지부터 신학자들을 사로잡아 온 화두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 인류의 역사가 뒤틀렸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정작 그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합의된 답이 없다. 이 칼럼은 먼저 그 대표적인 해석들을 짚어본 뒤, 그것들을 넘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여정을 따라 가보고자 한다.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전통적 해석들, 그 논쟁의 자리첫째, 순종의 시험이라는 해석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이후 개혁신학 전통은 선악과 자체에 어떤 마법적 속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가늠하는 시험대였다고 본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명하셨고, 이 명령 자체가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자기 위치를 인정하는지를 묻는 시금석이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죄의 본질은 열매의 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운 것'에 있다.둘째,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율적 도덕 판단권이라는 해석이다. 칼 바르트나 게르하르트 폰 라트 같은 학자들은 "선악을 안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문자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 '모든 것', 즉 포괄적 지식과 자기 결정권을 뜻하는 메리즘(merism)이라고 읽는다.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창 3:5) 안다고 유혹했다. 즉 인간이 탐한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가지신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타락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찬탈하려 한 사건이다.셋째, 성숙과 자의식의 각성이라는 해석이다. 일부 유대 전통과 비평학자들은 이 사건을 도덕적·성적 성숙, 혹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자의식의 각성(창 3:7)과 연결한다. 어린아이가 선악의 구분 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로 눈뜨듯, 인간이 순진무구에서 벗어나 책임적 존재로 나아간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해석은 앞선 두 해석에 비해 '죄'라는 무게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룬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이 세 해석 모두 나름의 통찰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에덴동산 사건을 창세기 2-3장 안에 가두어 놓고 읽는다. 이제 시선을 좀 더 넓혀, 에덴이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나는지를 따라가 보자.2. 에덴, 그 이름 뒤에 감추어진 성소"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8).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후 아무 데나 두신 것이 아니라 '거기'로, 곧 에덴이라는 특정한 자리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고 기록된다.에덴은 성경 안에서 단지 지리적 명칭에 머물지 않는다. 에스겔은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부르며 그것을 성전의 이미지와 겹쳐 놓고(겔 28:13-14), 이사야는 광야가 에덴 같이,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 같이 될 것이라 노래한다(사 51:3). 성경 여러 곳에서 에덴은 성산, 성소, 광야, 빈 들 등 여러 이름으로 변주되며 나타난다. 이는 에덴이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시는 자리, 곧 성소의 원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성소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서 있었다. 3. 예수, 그 성전이며 길이며 통로이 성소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인격으로 다시 나타난다. 예수께서 성전을 가리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을 때,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고 해설한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성소, 곧 에덴 성소의 실체이신 것이다.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에덴에 사람을 '데려다 두신' 것처럼, 예수는 사람들을 아버지께로 '데려가는' 길이요 통로가 되신다.흥미롭게도 성막과 성전의 입구는 언제나 동쪽을 향했다(출 27:13-16).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도 "전의 앞면이 동을 향한지라… 물이 성전 문지방 밑에서 나와서 동으로 향하여 흐르더라"(겔 47:1)고 기록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향해 "내가 네 자손을 동편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편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사 43:5) 말씀하셨고, 예수께서도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말씀하셨다. 동쪽 문은 흩어진 자들이 다시 모여드는 방향이며, 동시에 에덴을 지키던 그룹들이 서 있던 그 방향이기도 하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쫓겨났던 그 동쪽 문으로, 이제 예수를 따라 다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4. 옆구리 ... 신부의 탄생과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예수의 물과 피이 여정의 결정적 지점은 십자가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이 장면은 창세기의 또 다른 옆구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1-22). 아담의 옆구리에서 신부 하와가 나왔듯,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와 그의 신부, 곧 교회가 태어난다.그리고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1) 다시 열린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힌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휘장은 예수의 육체였다. 그 육체가 찢어짐으로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그런데 성막의 구조를 떠올려 보면, 성막 뜰에 들어서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에는 먼저 번제단이, 그다음 물두멍이 있었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출 30:18). 번제단에서는 피가, 물두멍에서는 물이 사람을 맞이한다.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나란히 서 있던 것처럼, 성막의 길목에도 피(번제단)와 물(물두멍)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 구조적 상응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이 둘, 곧 피로 상징되는 대속과 물로 상징되는 정결을 통과해야 한다.여기서 베드로전서의 한 구절이 결정적인 실마리를 던져준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라"(벧전 3:21). 물두멍의 물이 씻어내는 것은 육체의 때가 아니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죄의 본질이 다시 정의된다. 죄란 단순히 육체적 더러움의 흠결의 목록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물에서 씻긴 선한 양심조차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지 않는 것, 곧 사람 자신의 열심과 사람의 방식, 곧 이방인의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번제단과 물두멍은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다른 얼굴이다. 사람은 그 앞에서 자기 기준의 선과 악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한 분 앞에 자기 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5. 예수와 임마누엘이란 두 이름이 모든 여정은 결국 이름 하나로 수렴된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말했고, 곧이어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선포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번제단과 물두멍, 곧 피와 물로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분을 가리키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 구원의 목적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상태, 에덴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의 성취 를 가리킨다.에덴의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한다.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계 22:1-2). 쫓겨났던 동쪽 문으로 다시 들어가, 그룹들이 지키던 그 길을 지나, 마침내 생명나무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성경 전체가 그리는 하나의 큰 이야기다.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정의하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부자 청년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6-17) 답하셨다. 영생은 사람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쟁취하는 업적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다. 그 앎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이며, 그 관계의 이름이 곧 임마누엘이다.나가며, '생명나무'로 향하는 하나의 여정으로위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보면, 창세기의 선악과와 요한복음의 창, 마태복음의 이름 하나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 에덴 성소에 두셨고, 그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함께 두셨다. 사람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려다 그 길을 잃었고, 동쪽 문은 화염검으로 막혔다.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영이신 자신과 육체가 된 사람 사이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온 화목제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정원 성소를 다시 세우셨다. 생명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간 예수의 육신은 하나님이 계신 성소를 가렸던 휘장을 찢고 길을 만들었다. 십자가에서 그의 옆구리가 찢어져 물과 피가 흘렀고, 그 물과 피는 성막의 물두멍과 번제단처럼 사람을 씻고 대속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씻음이 겨냥하는 것은 육체의 더러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마음, 곧 사람의 방식으로 선악을 재단하려는 옛 죄성이다. 그 길을 통과한 사람은 마침내 동쪽 문 저편, 다시 세워진 생명나무 앞에 선다. 그 나무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시작되고 완성된다.십자가 예수의 옆구리를 통해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가듯, 우리도 신랑이 될 아담의 옆구리에서 탄생하는 여자인 하와처럼, 그 초대장을 따라 여정을 떠나보자.*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24 13:57:07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8편, 유월절 저녁 예식과 십일조 '144,000', 그리고 예수와의 관계 속에 태어나는 '빛의 탄생'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8편, 유월절 저녁 예식과 십일조 '144,000', 그리고 예수와의 관계 속에 태어나는 '빛의 탄생'

    성경 출애굽기에는 유월절 저녁에 모두가 지켜야할 엄중한 규례가 나온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출애굽기 12:21~25)유월절 양을 잡고 우슬초 묶음에 그 피를 적시어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이 오기까지 한사람도 집 문을 나서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이 규례는 애굽을 탈출하는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로 못박는다.이 유월절 저녁 규례는 출애굽 전 급히 행해지는 예식이다. 신약에서도 예수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 출애굽의 논의를 시작했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태복음 17:3)오늘 칼럼 마지막화에서는 유월절이 말하는 그날 저녁,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흠 없던 어린 양을 잡던 그날 저녁에 출애굽을 코 앞에 두고 급박하게 행해졌던 시간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유월절 저녁 예식에서 나오는 144,000명창조 첫째 날의 구조를 보면, 하루는 저녁과 아침으로 나뉜다(창 1:5 참조). 저녁이 먼저요 아침이 그 다음이다. 이 순서 자체가 이미 의미심장하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5)첫째 날은 어둠에서 빛으로,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던 저녁에서 탈출이 시작된 출애굽이 있던 아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하루의 첫 구조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저녁의 열두 시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떡을 떼신 유월절 만찬의 시간이다. 단순한 만찬 시간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생겨난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던 유월절의 흠 없는 양을 잡던, 급히 출애굽을 나서기 전 그 날의 저녁 시간인 것이다. 이 열두 시간에 반지름 6을 대응시키면, 입체 구의 겉넓이 공식 4πr²에 따라 겉넓이는 4 × π × 6² = 144π가 된다.평면의 원이 아니라 입체의 구로 넘어간다는 것은, 저녁이라는 시간이 단순히 하루의 한 조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 하나의 온전한 영역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저녁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양으로 열두 제자를 품은, 그리고 그 안에서 새 언약이 세워진 온전한 하나의 입체인 구(球)였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시공간이란 입체를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이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어떤 목적(빛의 탄생) 퀀텀 점프를 위한 양자 중첩, 양자 얽힘 같은 현상들이 보여 주는 관계(상호작용)처럼, 유월절 양을 잡던 그날 저녁의 모두가 영원히 지켜야할 예식, 즉 생명된 사람들의 빛의 탄생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 있던 저녁시간 사람들과 중첩되고 얽히며 생명탄생을 위한 관계(상호작용)를 맺으시는 것이다.저녁에 탄생하는 144,000과 십일조성경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한다."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베드로후서 3:8)이 말씀을 따라 144π에서 나온 144라는 숫자에 천(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된다. 이는 계시록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수로 나오는 바로 그 숫자다(계 7:4 참조). 유월절 저녁, 어린 양의 죽음,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그 규례 속에서 144,000이라는 수가 흘러나오는 것이다.또 하나, 하루 24시간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풀어 헤아려 보면, 144는 하루 1,440분 그 전체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자리에 선다. 십분의 일은 성경에서 낯선 개념이 아니다. 첫 열매와 처음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십일조의 정신이 시간의 구조 속에도 새겨져 있는 셈이다(레 27:30 참조).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고, 여기저기 산당을 짓고 사람이 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 멸망한, 그 민족의 뿌리조차 흩어져 버린 북이스라엘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한 방식이 아닌,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정한 예식과 규례에서 나오는 십일조가 144,000명이다.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때에 드릴찌며 (출애굽기 29:38~39)유월절 저녁이라는 거룩한 시간은 그 자체로 하루 전체 를 간통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히 구별되고 인을 치신 십일조의 시간에 참예함이라고 읽을 수 있다.'빛의 탄생'을 말하는 양자역학, 그 관계와 상호작용이제 두 번째 이야기, 빛의 탄생으로 넘어갈까 한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결국 관계와 상호작용이다. 입자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찰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상태가 결정된다. 이는 신앙의 언어로 옮기면 매우 익숙한 그림이다. 양을 예비하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과, 그 앞에 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다.앞 칼럼에서 본, 흠 없는 양을 준비하는 숫자 '4'와 광에서의 40년과 예수의 40일. 셋째 날 반 때 "씨(하나님의 말씀)'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이 상호 관계를 한다. "양자 중첩"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을 품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선다.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처럼(요 13:34 참조), 하나님과 사람은 얽혀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사랑과 은혜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양자 얽힘' 관계로 묶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다. 보이지 않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그리고 퀀텀 점프, 그 차이가 빛이 된다 전자가 낮은 궤도에서 높은 궤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질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 빛이 방출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이 말하는 빛의 탄생 원리다.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 그 사이를 잇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가며 궤도를 오르고 또 떨어진다. 온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가, 다시 사람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바로 그 오르내림의 차이, 그 사이에서 생명된 빛이 탄생한다.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분명히 선언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참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르내리며 겪는 그 진동과 차이, 그것이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칼럼을 마치며지금까지 반지름과 원, 구의 겉넓이, 양자의 중첩과 얽힘, 퀀텀 점프라는 물리학의 언어를 빌려 유월절 저녁과 빛의 탄생을 이야기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숫자와 도형, 물리적 비유는 결국 하나의 결론을 향해 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참조).숫자도, 원도, 구도, 양자의 언어도 결국 이 한 문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유월절 저녁을 영원히 기억하라 하신 그 규례의 마음도, 궤도를 오르내리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생명의 빛을 만들어내는 그 관계의 신비도, 모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목적,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 약 2천년 전, 이스라엘의 낮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던 창조물들을 다스리는 세상의 '왕' 대신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로 육신을 입고 와,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매고, 세상에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육신은 십자가 위에 못박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영'을 살리실 거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존한 채 믿음 속에 예수가 걸었던, 사람들을 향했던, 모든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길 바랐던 길이 참으시던 '사랑'이다. 이것으로 이 긴 '종교와 기하학' 칼럼의 여정을 마친다.*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24 07:04:55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7편, 인류가 발견한 위대한 상수 파이와 성전 정결 작업 16일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7편, 인류가 발견한 위대한 상수 파이와 성전 정결 작업 16일

    원주율(파이), 그리고 십자가 ... 숫자 속에 감춰진 구원의 자취원주율 파이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상수이다. 인류가 발견한 상수 가운데 파이(π)만큼 삶 깊숙이 스며든 것은 드물다. 우주의 궤도를 계산하는 천문학에서부터, 컵 하나의 둘레를 재는 일상의 순간까지, 원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파이가 함께한다. 이 글은 그 파이가 창세기의 첫날부터 성막의 기구, 그리고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실로 꿰어져 있다는 묵상을 담고 있다. 창조의 첫째 날, 그리고 반지름 0.5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빛이 나뉘어 하루가 시작된 것은 첫째 날, 곧 숫자 1이다. 이 숫자를 반지름으로 가져와 보자. 반지름이 0.5인 구(球)의 겉넓이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구의 겉넓이 = 4πr², 여기에 r = 0.5를 대입하면, 4 × π × (0.5)² = 4 × π × 0.25 = π이다.첫째 날 하루의 반지름 0.5를 입체인 구에서 겉넓이를 구하면 다른 무엇도 아닌 파이 그 자체로 수렴한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정갈한 이 수식은, 창조의 질서 속에 이미 원과 순환, 완전함을 상징하는 상수가 심겨 있었음을 떠올리게 한다.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파이가 원의 둘레와 넓이를 구하는 데 있어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상수이듯,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통로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십자가는 그 길을 여는 사건이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경로를 계산해낼 수 없듯, 구원 역시 다른 공식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물은 표(表)요, 선한 양심이 찾는 것은 하나님베드로전서는 노아의 방주를 지나며 물을 이렇게 해석한다."물은 예표라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라" (베드로전서 3:21)물 자체가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은 하나의 표(sign)다. 실제로 구원하는 것은 물이 상징하는 그 예표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선한 양심의 방향성이다. 파이가 원 자체는 아니지만, 원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수인 것과 닮아 있다. 표와 상수는 실체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실체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손가락 없이는 실체에 이를 방법이 없다.베드로의 발, 그리고 "나와 상관이 없다"요한복음 13장,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하실 때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8)이 씻음은 단순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였다. 정결하게 됨이 없이는 그분과의 연합도 없다. 이 장면은 곧 이어질 성막의 상징, 곧 물두멍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성막의 물두멍과 원주율성막과 성전의 기구 가운데 제사장이 손과 발을 씻던 물두멍(놋 바다)이 있다. 열왕기상 7장은 이 기구의 규격을 이렇게 전한다."그 지름이 십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열왕기상 7:23)지름 10, 둘레 30이라는 수치를 나누면 둘레/지름 = 3이 되어, 원주율의 근사값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성경 기자가 정밀한 소수점을 기록하려 한 것은 아니었겠으나, 원의 둘레와 지름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고정된 비율, 즉 '인간이 임의로 바꿀 수 없는 상수'가 성전의 정결 기구 속에도 내재해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정결의 예식은 사람이 편의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라, 파이처럼 이미 정해진 질서를 따라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양을 준비하는 기간 4일은 곧 성전 정결의 기간 16π이제 두 번째 숫자로 넘어가자. 반지름이 2인 구의 겉넓이를 구하면, 4 × π × (2)² = 4 × π × 4 = 16π이다.이 칼럼이 말하고자 하는 묵상은, 이 16이라는 수가 성전을 향한 정결 작업 전체의 기간과 조응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있던 저녁과 아침, 그 저녁과 아침이 이뤄재는 첫째 날은 파이와 맞닿아 있고, 16π는 그 상수가 일정한 기간(16) 동안 온전히 적용되어 완성에 이르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파이를 상징하는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가 정결케 하시는 사역이, 하루하루 쌓여 완전한 겉넓이, 완전한 정결에 이르는 궤적과 겹쳐지는 것이다.나가며, 결국 방향은 하나님을 향한다창조의 첫날에서 시작된 숫자 1이 파이라는 상수로 응축되고, 그 상수가 다시 16이라는 기간을 통해 완성에 이르는 이 흐름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한다. 구원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이 표가 되어 우리를 이끌고,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손길이 관계를 회복시키며, 성전의 물두멍이 정결의 질서를 상기시키듯, 파이라는 상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평면인 원의 중심에서 벗어난 모든 계산은 결국 어긋나지만, 실체가 있는 입체인 구의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은 언제나 동일한 하나의 진리로 귀결된다고. 그 진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23 06:55:52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6편, 흠 없는 양을 준비하는 기간 4일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6편, 흠 없는 양을 준비하는 기간 4일

    숫자 4, 40 ... 관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셈법성경을 읽다 보면 유독 반복해서 등장하는 숫자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4'라는 숫자는 유월절 어린양의 준비 기간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의 40년 세월,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 시험까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앞선 칼럼에서 살펴본 창조 셋째 날 반(半)의 회복의 원리가, 이 '4'라는 숫자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이어지는지 오늘은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1. 유월절 어린양, 나흘간의 준비출애굽기의 유월절 규례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달 십 일에 어린양을 취하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저녁에 잡으라는 명령을 받는다."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잡고" (출애굽기 12:3, 6)십 일부터 십사 일까지, 정확히 나흘이다. 이 나흘은 단순한 대기 기간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인지를 살피는 검증의 시간이다. 훗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시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죄 없으심이 거듭 확인되던 그 시간과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흘은 곧 '흠 없음이 드러나는 기간', 회복의 문 앞에서 거쳐야 할 확인의 시간이다.2. 광야의 시간 ... 40년, 40일, 그리고 4대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하나 있다."네 자손이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세기 15:16)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나야 했지만, 그 사십 년은 결국 '사대(四代)'라는 세대의 틀 속에서 완성된다. 마흔이라는 큰 시간은 그 안에 넷이라는 마디를 품고 있는 셈이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는데, 이 역시 40일이라는 총량 안에서 결정적인 국면들이 나흘 단위로 매듭지어지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광야 세월과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각기 다른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넷'이라는 매듭을 통해 같은 회복의 리듬을 증언하고 있다.3. 모리아산 사흘 길, 그리고 회복의 문턱앞선 칼럼에서 다루었듯, 창조 셋째 날 반부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이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할 때도 같은 리듬이 등장한다."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세기 22:4)사흘째 되는 날, 아브라함은 비로소 번제 드릴 곳을 눈으로 확인한다. 이 사흘은 창조의 셋째 날과 맞닿아 있고, 그 뒤를 잇는 '넷째'는 언제나 확증과 완성의 자리로 이어지고 있다. 사흘이 회복의 문턱이라면, 넷째는 그 문턱을 넘어 실제로 회복이 이루어지는 자리인 셈이다.4. 첫째 날과 파이(π), 창조 질서 속 수학의 흔적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5)여기서 저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날과 포개어 볼 수 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규례에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아침까지 문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너희는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출애굽기 12:22)저녁의 죽음과 아침의 부활, 그 사이 문을 걸어 잠그고 기다리는 밤, 이것은 창세기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는 리듬과 맞닿아 있다. 유월절 저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한 자들이 맞닿은 창조 그 첫째 날, 생명돈 사람들의 빛이다.그리고 이 '첫째 날' 1이란 숫자는 흥미롭게도 기하학에서도 의미심장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지름이 0.5인 구(球)의 겉넓이를 구하면, 공식 4πr²에 따라 정확히 파이(π)가 된다.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상수 가운데 하나인 파이가, 가장 작은 단위인 '1'과 '반(半)' 속에 이미 담겨 있었던 셈이다. 우주의 질서와 창조의 첫날이 숫자 하나로 은밀히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창조가 결코 우연한 나열이 아니라 정교한 셈법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여준다. 5. 기하학에서의 성전 정결작업 연결숫자 4는 하나님이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도하는 관계회복이다. 즉 돌아 온 이스라엘에 대한 성전 정결작업이다."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정월 초하루에 성결하게 하기를 시작하여 그 달 초팔일에 여호와의 낭실에 이르고 또 팔일 동안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정월 십육일에 이르러 마쳤더라(역대하 29:17) 이는 곧 하나님의 새로운 절기 희년과 맞닿아 있다. 앞 칼럼에서도 말했지만, 희년에는 땅이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가고, 빚이 탕감되며, 종이 자유를 얻는다. 이는 사람이 계산으로 만들어낸 순환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시공간에 친히 개입하실 때 생겨나는 회복과 은혜의 수다.나오며, 숫자로 새겨진 관계 회복의 이야기나흘의 어린양, 사십 년과 사대(四代)의 광야, 사흘 길 모리아산, 성경에서 보여주는 숫자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 다른 사건 속에 흩어져 있지만, 하나의 실로 꿰어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해 가시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창조 때부터 새겨두신 이 셈법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초청이다. *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22 10:42:40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5편, 동전의 역설을 통해 바라본 70이레 다음 해 '희년'과 '짐승, 사람의 수 666'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5편, 동전의 역설을 통해 바라본 70이레 다음 해 '희년'과 '짐승, 사람의 수 666'

    동전의 역설 N+1을 통해 바라보는 희년과 회복동전 하나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똑같은 크기의 동전 두 개를 탁자 위에 놓아보자. 하나는 고정하고, 다른 하나를 그 둘레를 따라 미끄러지지 않게 굴려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굴러간 동전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동전은 스스로 몇 바퀴 돌았을까?직관적으로는 "1바퀴"라고 답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동전은 2바퀴를 돈다. 이른바 "동전의 역설(coin rotation paradox)"이다. 굴러가는 동전이 고정된 동전의 둘레를 한 번 공전하는 동안, 자기 자신도 한 번 더 자전하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반지름이 같은 두 원이 서로 바깥에 맞닿아 굴러갈 때 회전수는 'N + 1'이 된다. 반대로 큰 원 안쪽에 맞닿아 도는 작은 원은, 공전과 자전의 방향이 서로를 상쇄하기 때문에 회전수가 오히려 하나 줄어든' N − 1'이 된다. 같은 굴림 운동인데, 바깥을 도느냐 안을 도느냐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의 부호를 갖는 것이다. 이 단순하지만 깊은 기하학적 사실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학적 묵상의 출발점이다.밖에서 도는 원 'N+1 세계항성일과 태양일일 기준으로 실제로 천문학에서 존재하는 +1의 세계가 있다. 이 원리는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천문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1년 동안, 태양을 기준으로 셈한 하루(태양일)는 약 365.25일이다. 그런데 저 멀리 고정된 별빛을 기준으로 지구의 자전을 세면(항성일), 그 횟수는 약 366.25일로 하루가 더 많다.이는 동전의 역설과 정확히 같다. 지구는 자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그 공전 자체가 별빛의 기준에서 볼 때 자전을 한 바퀴 더 보태주는 셈이다. 즉 "땅에서, 태양을 기준으로" 센 365.25일에 +1이 더해져, "빛(별)의 기준"에서는 366.25일이 되는 것이다. 우주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무언가의 바깥 둘레를 따라 도는 회전에는 언제나 이 +1이 따라붙는다. 희년, 일곱째 안식년 70이레 다음의 +1하나님은 구약에서 형식적인 사람들의 예배로 인해 안식일과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를 폐하셨다."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호세아 2:11)"성막을 동산의 포도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그 공회의 처소를 멸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셔서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예례미야애가 2:6)동전의 역설에 등장하는 N+1의 원리를 성경의 절기로 옮겨보면, 안식일과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를 폐하면서까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절기,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한 해의 시작인 '희년'이 보인다. 레위기의 희년 규례는 일곱 해씩 일곱 번, 곧 49년(7이레)을 센 뒤, 오십 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선포한다. 얼핏 보면 49에 그저 1년을 더한 산술처럼 보이지만, 이 칼럼이 주목하는 지점은 그 성격이다. 하나님이 뿔나팔을 불어 선포하신 '희년'은 단순히 "49년 다음 해"인 오십 년째가 아니라, 모든 날의 첫째 날이자 새로운 절기,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한 해의 시작이다.희년에는 땅이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가고, 빚이 탕감되며, 종이 자유를 얻는다. 이는 사람이 계산으로 만들어낸 순환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시공간에 친히 개입하실 때 생겨나는 +1이다. 동전이 상대방의 바깥을 한 바퀴 돌 때 자기도 모르게 한 바퀴를 더 얻듯, 희년의 오십 번째 해는 인간의 계산 바깥에서 하나님이 더하시는 은혜의 한 바퀴다.이는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하고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답한다(여호와이레).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도 결국 같은 '은혜'의 원리다. 사람의 계산과 준비가 끝나는 자리,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를 더하여 채워 주신다. 인간의 방식으로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더해지는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다. 짐승과 사람의 수 666 ... 시공간 안에서 도는 원 'N−1'의 세계"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요한계시록 13: 18)사단이 갇힌 시공간, 동전의 역설이 보여준 또 하나의 의미를 기억하자. 큰 원의 안쪽에 맞닿아 도는 작은 원의 회전수는 N−1이다. 바깥을 자유로이 도는 원과 달리, 안쪽에 갇힌 채 도는 원은 오히려 '은혜'라는 한 바퀴를 잃는다.우주를 상징하는 큰 공간 안에 갇힌 시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을 뜻한다. 완벽한 사방을 뜻하는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를 구하는 산술식에서 "πR²"이 하나가 부족하다. 이는 에스겔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방(四方)"의 완전수 4에서 하나가 빠진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쉽다.온전한 넷이 아니라 셋만 남았을 때, 구(球)의 겉넓이 공식 4πR²은 온전함을 잃고 3πR²에 머문다. 하나가 빠진 자리, 위에서 말한 바 같이 더해진 하나님의 '은혜'가 빠지고, 완벽한 입체마저도 그려내지 못하는진 그것이 바로 이 칼럼이 말하는 N−1의 형상이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창조의 7일 안에 갇힌 회전, 입체인 말씀이 육신을 입은 예수의 형상에서도 하나가 빠진 사방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요한계시록의 "사람의 수" 666으로 이어진다. 완전을 상징하는 수(數)에 못 미치는 결핍의 세 번 반복(6, 6, 6)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안쪽에서 돌며 스스로 하나를 잃는 N−1의 회전과 같은 결을 이룬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다서 1:6)"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베드로후서 3:7)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전하는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된" 공간, 흑암에 가두어 둔 천사들의 처소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더하신 '은혜'가 단절되고, 말씀이 육시을 입은 입체인 예수 그리스도형상에도 못미치는 결핍, 시공간 안에 갇혀 하나를 잃는 회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시공간 안에 갇힌 사단의 기하학적 형상이다.동전의 역설, 그 두 회전이 말해주는 것정리하면 이 묵상의 구조는 이렇다. 큰 우주라는 시공간과 맞닿아 회전하는 원이 단절과 담장을 허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시공간에 '은혜'를 더한 N+1의 희년, 그리고 항성일,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 시공간 안쪽에 불태워지기 위해 간수된 N−1이 가르키는 '666'과 흑암에 갇힌 천사들같은 동전, 같은 굴림 운동이지만 위치가 바깥이냐 안쪽이냐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다. 이 칼럼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갇힌 시공간에 하나님이 친히 더하시는 은혜 +1이 온다. 희년은 그 +1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뿔나팔을 불어 선포하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절기다. 땅은 원주인에게, 빚진 자는 자유로, 종은 해방으로, 멸망해 그 민족마저 흩어져버린 북이스라엘처럼 "사람들이 정한 예배방식이 아닌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제5편을 마치며동전 하나를 굴려보는 단순한 놀이가, 우주의 항성일과 태양일의 차이를 설명하고, 나아가 희년의 신비와 심판의 형상까지를 비추어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글은 수학적 사실(동전의 회전 파라독스, 항성일과 태양일의 차이)과 성경적 절기·상징(희년, 여호와이레, 666, 에스겔의 사방)을 하나의 은유적 틀로 엮어본 신학적 묵상이다. 독자마다 이 상징을 받아들이는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질문은 함께 필자가 남기고 싶다. "나는 지금, 시공간에 더해지는 은혜의 회전 위에 있는가, 아니면 불태워지기 위해 간수된 시공간 안에 갇혀 신을 잃어가는 회전 위에 있는가."*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20 07:35:00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4편, '70이레(49년)'와 물에서 끌어 올린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 수 153'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4편, '70이레(49년)'와 물에서 끌어 올린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 수 153'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를 구하기 전 ... 소수점 절삭(버림)에 관해다윗이 두 번 서 있는 계보"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마태복음 1:17)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위 계보는 단순 산술로는 14대+14대+14대=42대이다. 그런데 실제 계보를 세어 보면 '다윗'의 이름이 두 번에 걸쳐 있어, 실제로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은 41명이 된다. -즉 '겹침' 속에 '-1'이 숨어 있다.이 성경적 실마리를 따라 앞으로 게재되는 칼럼 속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 산술식에서 '기간'과 '수(數)'가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기간'을 제외한 '수'를 나타내는 곳에서는 소수점 이하는 절사(버림)할 예정이다. 그 이유는 아래 추가 설명이 나온다. 다니엘서의 70이레(49년)"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다니엘 9:25~27)다니엘 9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중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하나님은 "칠십 이레(49년)"를 정했다. 7이라는 완전수가 일곱 번 겹쳐 만들어지는 이 49라는 숫자는, 창조된 7일과도 맞닿아 있다. 세상에게 허락된 시간이다.49년 다음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절기 50년째에 맞는 '희년'이 시작되기 때문에, 기존 세상을 70이레로 제한한 것이다.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전체 기간을 7일로 보고, 그 절반인 3.5일을 구(球)의 반지름으로 놓고 겉넓이를 구하면, 반지름이 3.5인 입체 구(球)의 겉넓이는 49π이다,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에서 등장할 '기간'과 '수(數)' 중에 '기간'인 70이레(49년)이다.여기에 등장하는 파이(π)는 칼럼 후속편에서 따로 설명할 예정이다. 왜 항상 '기간'에 파이가 그 중심에 서는지를. 물에서 건져 올린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 수 '153'"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한복음 21:10~11)앞에서 49π가 '기간'을 나타내는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세상에게 정해진 기간 70이레이면, 153은 '수(數)'를 나타낸다. 정해진 70이레 기간동안 물에서 끌어 올려지는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 수다.'기간' 49에 파이 π(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를 곱하면 '수(數)' 153.93804...이 등장한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간'을 제외한 '수'를 나타내는 곳에서는 소수점 이하를 절삭(버림)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필자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42대가 다윗이 두 번에 걸쳐 겹침으로 실제는 41대로 -1인 것처럼, 소수점 이하를 필자 개인의 편의에 의해 절삭(버림)하기로 한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태복음 1:17)절삭(버림)의 또다른 이유는 산술적으로도 파이(π)는 62조 8000억 번째 자리까지 계산한 기록이 있는 소수점 이하가 무한하게 펼쳐진 무리수이자 비순환 무한소수이기 때문에, 정확한 값을 숫자로 완전히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기간' 49에 파이 π(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를 곱하면 '수(數)' 153이 등장한다.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가 지시하신 곳에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자 잡힌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수학적으로 '153'은 몇 가지 독특한 성질을 가진 숫자이다. 아래는 필자가 아닌 일부 창조과학자나 성경학자들의 논리다. - 삼각수: 1부터 17까지 모든 정수를 더하면 153이 된다(1+2+3+…+17=153).- 암스트롱 수: 1³+5³+3³ = 1+125+27 = 153, 즉 각 자릿수의 세제곱의 합이 자기 자신과 같다.신학적으로도 이 '153'이라는 숫자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다. 어떤 이들은 성막의 지성소가 정육면체 구조였다는 점과 연결해 '거룩함'의 상징으로, 어떤 이들은 시편에서 다윗이 "많은 물"에서 건짐받았다는 이미지, 엘리야가 다스렸던 물(바다) 이야기와 엮어 "세상의 바다에서 건져진 자들"이라는 선교적 상징으로 읽기도 한다. 물고기 그물이 온 세상 민족을 상징한다는 해석은 초대교회 이래 꾸준히 있어 왔다. 성경의 숫자들은 정밀한 과학의 공식이 아니라 의미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다. 필자는 숫자의 정확한 일치를 찾아 헤매기보다, 그 숫자들이 가리키는 이야기, 즉 창조와 평행선을 그리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에 대한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입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물에서 건짐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였음 하는 바람이다.*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16 07:24:01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3편, 성전 측량 ...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3편, 성전 측량 ...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

    성경에서 '측량'이 뜻하는 의미성경에서 '측량'은 단순한 자로 재는 건축의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처소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지닌 계획과 질서 위에 세워졌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다."인자야 너는 이 족속에게 이 전을 보여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에스겔 43:10)여기서 핵심 단어는 '죄악', '부끄러움', 그리고 '형상'이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형상이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죄악'과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형상,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의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진실이다.십자가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 그리고 열리는 성전의 문지난 칼럼 1편에서 필자는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평행선'을 이야기했다. 죄악으로 인해 영원히 만날 수 없었던 신과 인간 사이의 평행선의 담장을 허무신 분이 곧,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실체를 드러낸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 위,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를 따라가면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이어진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십자가에서 예수의 옆구리가 찔렸을 때 흘러나온 물과 피는 일반적인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가 그 안에 담겼다.예수는 단순히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내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데려가기 위해 이 땅에 왔다."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3:21)"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베드로전서 3:18)물은 육신의 더러움을 씻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19~22)물과 피가 나오는 그 통로, 곧 군병의 창에 찔린 그 옆구리에 난 동쪽 문을 따라 성막 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피(번제단)과 물(물두멍, 곧 '바다')이다.하나님은 지으신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7~9)에덴은 하나님의 성소, 광야, 빈들, 성산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두로'와 '아담' 처음 사람들의 불의가 드러난 이 곳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는 이유는, 이곳을 다시 회복하기로 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다. 그리고 부른 이유도 처음과 똑같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래서 그 시험을 통해 '복'을 주기 위함이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16)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막 뜰에서 마주하는 번제단과 물두멍('바다')의 이야기는 다음 칼럼에서 자세히 이어가도록 하겠다.그러면 앞으로 칼럼에서 사용될 산술식은 왜 하필 입체인 '구(球)'인가열왕기상 7장은 성막 기물 중 '바다'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1. 원, '바다'의 둘레와 지름"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그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고가 오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왕상 7:23)2. 사방, 안정성을 상징하는 입체"또 놋으로 받침 열을 만들었으니 매 받침의 장이 네 규빗이요 광이 네 규빗이요 고가 세 규빗이라" (왕상 7:27)"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이 오백 척이며 광이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 42:20)사방을 나타내는 사각형은 네 변과 네 꼭짓점이 만들어내는 안정성과 견고함을 상징한다. 흔들리지 않는 기초, 반석 위에 세운 집의 형상이다. 그리고 원의 넓이(πr²)가 네 개 모이면, 4πr², 곧 원의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가 된다.3. 구, 기둥머리와 그물 장식"이 두 기둥머리에도 그물 곁 곧 배 같이 부른 곳으로 말미암아 각기 머리 위에 석류 이백이 줄을 지었더라" (왕상 7:20)여기서 "배 같이 부른 곳"이라는 표현이 핵심이다. 기둥머리가 단순한 원기둥의 상단이 아니라,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구형(球形)'이었다는 뜻이다."두 기둥과 두 기둥 위에 있는 두 그릇 같은 머리와 ... 그 머리 위의 석류 사백 개" (왕상 7:41~42)'그릇 같은 머리', 즉 사발이나 공 모양의 머리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둥머리가 '평면적 원'이 아니라 '입체적 구'임을 거듭 확인시키는 대목이다.평면에서 입체로왕상의 저자는 이 '바다'를 평평한 원반이 아니라, 처음부터 '둥근(round)' 입체, 곧 대야와 같은 곡면의 그릇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바퀴와 네 형상도 마찬가지다.원의 둘레 공식(2πr)에 담긴 원주율은, 곧바로 이어지는 구형 기둥머리의 곡면 묘사와 맞물리며 평면의 논리를 입체로 확장시킨다. "셋은 북을 향하였고 셋은 서를 향하였고 셋은 남을 향하였고 셋은 동을 향하였으며" (왕상 7:25)동서남북, 즉 3차원 공간의 전 방위를 향해 배치된 열두 마리의 소는 '바다'가 단지 평면의 원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동일한 곡률을 지니는 입체 구(球)로서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평면 기하학의 원이 공간 속에서 회전할 때 만들어지는 도형이 바로 입체인 구(球)이며, 그 겉넓이는 원의 넓이(πr²)의 정확히 네 배(4πr²)가 된다. '바다'의 수치는 단순한 둘레 계산을 넘어, 입체적 완전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바다'는 제사장이 씻기 위한 용도이다."또 물두멍 열을 만들어 다섯은 우편에 두고 다섯은 좌편에 두어 씻게 하되 번제에 속한 물건을 거기 씻게 하였으며 그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더라"(역대하 4:6)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도착한 성막 안 뜰, 번제단과 물두멍(바다)은 바로 생명나무로 나아가기 전 '죄악(번제단)'과 '부끄러움[물두멍)'을 씻기 위한 신학적 장치다.다음 칼럼부터는 실제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를 구하는 기하학 산술식을 통해, 이 수치들이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본격적으로 측량해 볼 예정이다.*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15 07:31:00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2편, 창조 셋째 날 '반 때' ... "씨"가 그 중심에 서다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2편, 창조 셋째 날 '반 때' ... "씨"가 그 중심에 서다

    '반 때'란 무엇인가창세기를 읽다 보면 우리는 1장과 2장 사이, 시간의 간격이 어긋나 있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성경은 이 '반 때'에 대한 사례들이 많다. 요한계시록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합하여 삼 년 반)가 그 대표적인 예다.이 칼럼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시작해 마태복음의 족보, 누가복음의 무화과나무 비유, 요한계시록의 광야 이야기까지를 하나의 실로 꿰어, 이 '반 때'라는 시간의 결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살펴보려 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씨'가 있다.창세기 1장과 2장 사이, 보이지 않는 간격창세기 1장 셋째 날, 하나님은 명하신다."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세기 1:11)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 창조 셋째 날은 어떤 '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분명 셋째 날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할 그 장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창세기 2:5)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다. 밭에는 채소가 "아직" 나지 않았다. 창세기 1장에서 셋째 날에 "그대로 되었다"고 선언된 것이, 2장에서는 "아직"이라는 말로 유보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의 간격을, 성경은 두 가지 이유로 짚어 준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비는 자주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가리키는 은유로 쓰인다. 단비처럼 내리는 가르침 없이는 씨가 자랄 수 없다. 그리고 그 '씨'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누가복음 8:11)씨는 심겨졌지만 밭을 가는 사람도 없고, 땅에 내리는 단 비도 없어, 씨는 자라나지 못한 채 멈춰 있다. 창조는 완성되었지만, 그 창조가 씨가 들과 밭에 뿌려져 열매로 회복되는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셋째 날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간격, '씨'는 놓였지만 아직 결실로 이어지지 않은 이 '반 때'는 이후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패턴이 된다.셋째 날 반 때, '씨', '밭', '채소', '과목'은 천국 비유창조 셋째 날 '반 때"부터 나오는 씨, 밭, 채소, 과목 등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천국에 비유했다."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그리고 그것은 예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 3:22)공중의 새들이 예수라는 나무 가지에 깃든다. 그 중심에는 '씨(하나님 말씀)'가 있다.예수 그리스도 족보 속에 감추어진 '반 때'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 족보는 이 패턴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 준다."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 1:17)14대, 14대, 14대. 겉으로는 마흔두 대가 가지런히 세 묶음으로 나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2절부터 16절까지 이름을 하나씩 세어 보면, 마지막 세 번째 묶음은 다른 두 묶음과 달리 온전한 열넷을 채우지 못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다.겉모습은 완전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마지막 한 칸이 비어 있는 셈이다. 이는 창세기 2장의 "아직"과 같은 구조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실제로는 채워지지 않은 반 칸, 곧 '반 때'가 숨어 있다. 그 빈 시기는 공교롭게도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곧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침묵 속에 놓여 있던 시대와 맞물린다. 창세기에서 씨가 심긴 채 자라지 못했던 그 정지의 시간이, 족보 위에서는 비어 있는 한 칸으로 다시 나타나는 셈이다.삼 년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그리고 '반 때'를 더 구하는 청지기누가복음의 비유는 이 '반 때'의 의미를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누가복음 13:7)주인은 삼 년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려 한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답한다."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누가복음 13:8)여기서 놓치기 쉬운 사실 하나가 있다. 무화과나무는 본래 한 해에 두 번, 곧 봄 무화과와 여름 무화과를 맺을 수 있는 나무다. 예수가 다른 곳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며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여름 무화과, 곧 한 해의 나머지 절반을 가리킨다.그렇다면 포도원지기가 구하는 "금년"은 이미 다 지나가 버린 한 해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는 반 때, 곧 여름 무화과가 맺힐 그 시간이다. 삼 년의 기다림 끝에, 나무에게 다시 반 때가 허락된 것이다.광야의 여자와 한 때, 두 때, 반 때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시간의 단위가 다시 나타난다."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요한계시록 12:14)한 때, 두 때, 반 때를 합하면 삼 년 반이다. 광야로 쫓겨간 여자가 보호받는 이 기간은, 앞서 살펴본 무화과나무에게 더 허락된 삼 년과 반 때의 패턴과 정확히 겹친다.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그림이 겹쳐 보인다. 창세기 2장의 유보된 씨앗, 마태복음 족보의 비어 있는 반 칸, 무화과나무에게 더 허락된 한 해의 절반, 그리고 광야에서 여자가 보호받는 삼 년 반. 시대도 다르고 등장인물도 다르지만, 이 네 장면은 같은 하나의 리듬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다. 완성처럼 보이던 시간 속에 감추어진 '반 때'의 간격, 그리고 그 간격이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씨를 가지고 밭을 가는 사람, 마침내 오다그렇다면 창세기 2장이 말한 두 가지 결핍, 곧 '비'와 '땅을 갈 사람'은 언제, 어떻게 채워지는가. 예수는 천국을 이렇게 비유한다."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태복음 13:3)창세기 1장에서 심기고 2장에서 아직 자라지 못한 채 멈춰 있던 그 씨앗이, 마침내 뿌려지고 자라나 결실을 맺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밭을 가는 이가 누구인지, 예수는 스스로 밝힌다."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한복음 15:1)땅을 갈 사람이 없어 초목이 자라지 못했던 그 자리에, 이제 참 농부이신 아버지와 참 포도나무이신 아들이 함께 서 계신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씨"는 하나님 말씀이요, 마르고 황폐한 밭에 마침내 그 생명을 품은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하나님 교훈이 단비 같이 내린 뒤, 밭을 가는 이가 오신 것이다.셋째 날 심긴 씨앗은 결코 잊힌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씨앗이 자라날 반 때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밭을 갈 준비하고 계셨을 뿐이다.나가며, 다시 열리는 '반 때'창조의 셋째 날부터 요한계시록의 광야까지, 성경은 반복해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반 때'를 보여 주고, 그 반 때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을 예비해 왔다. 열매 없는 삼 년 뒤에 더해진 한 해의 절반처럼, 침묵의 시대 뒤에 감추어진 족보의 반 칸처럼, 광야에서 보호받는 삼 년 반처럼. 하나님은 결핍의 시간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그 반 때를 다시 채울 농부를 그 땅에 보내신다.천국을 회복하기 위한 셋째 날의 씨는 마침내 이 땅에 뿌려졌다. *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14 07:39:30 정진욱 칼럼니스트
  •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1편, 평면 위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직선 '평행선' ... '입체인 구(球)'에서 만나다
    종교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1편, 평면 위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직선 '평행선' ... '입체인 구(球)'에서 만나다

    평면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직선유클리드가 기하학 원론에서 세운 다섯 번째 공준, 이른바 '평행선 공준'는 단순하지만 또한 단호하다. 끝이 없고 완전히 평평한 2차원 공간 평면에서 나란히한 두 직선의 평행선은 아무리 무한히 연장해도 결코 만나지 않는다. 종이 위에 또는 칠판 위에, 우리가 사는 평면의 세계에서 이것은 반박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다.인간과 신과의 관계도 오랫동안 그렇게 그려져 왔다. 나란히 존재하지만 결코 교차하지 않는 두 개의 선.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2)'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사람의 죄악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간격이다. 평면 위에서 평행선이 아무리 연장되어도 만날 수 없듯이, 죄로 인해 벌어진 그 간극은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적 진보만으로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유클리드의 제5공준인 평생선 공준이 평면의 절대 법칙이듯, 죄와 거룩함 사이의 단절도 성경에서는 단호하고 절대적이다.하지만 평면을 벗어나면 규칙이 바뀐다19세기, 가우스·로바체프스키·리만 같은 수학자들은 유클리드 제5공준에 질문을 하나 던졌다. "만약 우리가 평면이 아니라 곡면 위에 있다면?" 그 질문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태어났다. 특히 구면(球面) 위에서는 '평행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르게 작동한다. 지구본을 떠올려 보자. 자오선(경선)들은 적도에서 서로 완벽하게 평행하다. 남북으로 나란히, 같은 간격으로 뻗어 있다. 평면적 직관으로는 이 선들이 영원히 만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 선들을 따라 계속 나아가면 결국 모두 북극점과 남극점에서 하나로 만난다. 평면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차원이 하나 더해진 입체 '구(球)'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만남의 결과가 된다. 평행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놓인 공간이 더 큰 차원으로 확장되었을 뿐이다.빛의 관점에서 보아도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기준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거리의 간격이 무의미해진다는 상대성이론의 통찰처럼, 또는 하늘의 별들이 하루(항성일) 동안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회전축의 두 끝 '천구의 극'에서 모든 별의 궤적이 한 점으로 수렴하듯, '결코 만날 수 없어 보이는 것'은 더 높은 기준점에서 보면 이미 하나의 중심을 공유하고 있다.입체인 구(球)에서 평행선의 만남, 그 중심에 서신 분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인간의 차원, 즉 죄로 물든 평면 위에서는 결코 좁혀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 곧 성육신이라는 '입체'를 여심으로 그 평행선을 하나로 모으셨다. 바울은 그 중재자를 이렇게 소개한다."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다. 이는 기하학적으로 말하면, 평면의 법칙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그 평면을 감싸는 구(球) 자체가 된 것 같다. 평면 위의 두 평행선은 그 입체인 구의 표면 위에서 비로소 하나의 점, 극(極)에서 만난다. 에베소서는 그 만남을 '담을 허무심'으로 묘사한다."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베소서 2:14)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든,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담이든, 그리스도는 스스로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두 선이 만나는 접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바로 그 유일한 접점,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밝혔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평행선의 역설이 주는 위로유클리드 기하학만 아는 사람에게 "평행선이 만난다"는 말은 모순이다. 그러나 더 큰 차원, 곧 입체인 구(球)의 면 위에서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 된다. 마찬가지로 죄로 단절된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더 큰 차원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새로운 입체적인 공간'에서는 그 화해가 이미 이루어진 실재다.평행선은 거짓이 아니지만, 다만 평면이 전부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평면을 넘어 우리를 입체의 세계로, 만남의 중심으로 이끄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2026-07-13 07:36:50 정진욱 칼럼니스트
  • 성주군 관운사,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 봉행
    문화/생활

    성주군 관운사,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 봉행

    24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경북 성주관운사에서 '봉축 법요식'이 봉행돼 신도와 지역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이날 법요식은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시작으로 봉축사와 축원, 관불 의식 순으로 진행됐으며 참석자들은 부처님의 자비와 가르침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사찰 경내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걸려 봉축 분위기를 더했으며, 신도들은 가족의 건강과 지역사회의 안녕을 기원했다.관운사 주지스님은 “부처님 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서로를 배려하고 나누는 마음이 지역사회에 널리 퍼지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전통문화와 불교 정신을 알리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행사에 참석한 주민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연등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부처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 관운사는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봉축 법요식과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며 지역민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2026-05-25 06:52:06 이태검 성주·칠곡·의성
  • [기획 리포트] 자비심이 닦는 지구… ‘탄소 중립’으로 환생한 부처님 오신 날
    종교

    [기획 리포트] 자비심이 닦는 지구… ‘탄소 중립’으로 환생한 부처님 오신 날

    일회용품 없는 연등회·저탄소 사찰음식, 기후 위기 시대 ‘생명 존중’의 실천 108개 사찰 재생에너지 100% 로드맵 선언, ‘그린카본’ 거점 된 산림 관리까지
    5월 24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불교계가 ‘탄소 중립’을 향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단순히 불을 밝히는 축제를 넘어, 기후 위기라는 인류 공동의 과제에 응답하기 위해 사찰 운영부터 행사 방식까지 ‘녹색 혁신’을 단행한 것이다.연등회, 비닐 대신 종이와 대나무로 ‘환생’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연등회가 올해는 더욱 친환경적인 모습으로 시민들을 만난다. 연등 행렬은 오는 5월 16일 오후 7시부터 흥인지문 동대문에서 출발해 종로를 거쳐 조계사까지 이어진다. 연등놀이는 다음날 17일 오후 7시부터 2시간동안 인사동에서 조계사 앞까지 진행될 계획이다. 조계종을 비롯한 주요 종단은 이번 봉축 행사에서 플라스틱이나 비닐 소재의 사용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친환경 연등 보급하고 대량 생산되던 플라스틱 골조 대신 대나무와 전통 한지를 사용한 연등 제작을 장려하고 있다.또 부처님 오신 날 당일 사찰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제공되는 비빔밥 등 대중 공양에서도 일회용 식기 대신 다회용기를 전면 도입하거나, 개인 수저 지참 캠페인을 벌인다.사찰 전기는 햇빛으로… ‘RE100’ 실천 박차 불교계는 ‘불교 RE100’을 선언하고, 108개 주요 사찰을 시작으로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는 로드맵을 세웠다. RE100은 'Renewable Energy 100%'의 약자로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2050년까지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자발적인 글로벌 캠페인이다.이에 전통적인 풍경을 간직한 산사들도 에너지 전환에 앞장서고 있다. 고양 법문사, 세종 영평사, 인제 백담사 등 전국의 주요 사찰들은 건물 옥상이나 주차장 부지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해 사찰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스스로 조달하는 ‘에너지 자립 사찰’로 변모 중이다.문화재 보호 구역이라는 특성상 설치가 까다롭지만, 경관을 해치지 않는 기와형 태양광 패널 등을 도입해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고 있다. 또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삼보사찰)를 비롯해 오대산 월정사, 지리산 화엄사, 설악산 신흥사 등이 산림청과 업무협약을 맺고 사찰이 보유한 방대한 면적의 산림을 ‘탄소 흡수원’으로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산불 예방과 생태계 보전을 통해 블루카본(습지)에 이은 그린카본 확보의 거점으로 거듭나고 있다.‘사찰 음식’, 탄소 발자국 줄이는 식탁의 혁명최근 MZ세대 사이에서 ‘비건’ 열풍과 함께 주목받는 사찰 음식은 기후 위기 대응의 핵심적인 대안으로 꼽힌다.저탄소 식단으로 육류 소비를 지양하고 제철 식재료와 로컬 푸드를 활용하는 사찰 음식은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일반 식단 대비 획기적으로 낮춘다. ‘발우공양’ 정신을 계승한 잔반 없는 식사 문화는 음식물 쓰레기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실천적 환경 운동으로 평가받는다.“기후 위기 극복, 마음의 탐욕 줄이는 것부터”조계사 관계자는 “부처님 오신 날의 진정한 의미는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자비심에 있다”며 “기상 이변으로 생태계가 신음하는 지금, 불교계의 탄소 중립 노력은 종교적 수행을 넘어 지구촌 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불교계의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 전반의 탄소 중립 실천을 이끄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6-05-11 13:15:46 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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