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에 들어가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9)는 창세기 첫 페이지부터 신학자들을 사로잡아 온 화두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 인류의 역사가 뒤틀렸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정작 그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합의된 답이 없다.
이 칼럼은 먼저 그 대표적인 해석들을 짚어본 뒤, 그것들을 넘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여정을 따라 가보고자 한다.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전통적 해석들, 그 논쟁의 자리
첫째, 순종의 시험이라는 해석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이후 개혁신학 전통은 선악과 자체에 어떤 마법적 속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가늠하는 시험대였다고 본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명하셨고, 이 명령 자체가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자기 위치를 인정하는지를 묻는 시금석이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죄의 본질은 열매의 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운 것'에 있다.
둘째,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율적 도덕 판단권이라는 해석이다. 칼 바르트나 게르하르트 폰 라트 같은 학자들은 "선악을 안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문자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 '모든 것', 즉 포괄적 지식과 자기 결정권을 뜻하는 메리즘(merism)이라고 읽는다.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창 3:5) 안다고 유혹했다. 즉 인간이 탐한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가지신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타락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찬탈하려 한 사건이다.
셋째, 성숙과 자의식의 각성이라는 해석이다. 일부 유대 전통과 비평학자들은 이 사건을 도덕적·성적 성숙, 혹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자의식의 각성(창 3:7)과 연결한다.
어린아이가 선악의 구분 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로 눈뜨듯, 인간이 순진무구에서 벗어나 책임적 존재로 나아간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해석은 앞선 두 해석에 비해 '죄'라는 무게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룬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세 해석 모두 나름의 통찰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에덴동산 사건을 창세기 2-3장 안에 가두어 놓고 읽는다. 이제 시선을 좀 더 넓혀, 에덴이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나는지를 따라가 보자.
2. 에덴, 그 이름 뒤에 감추어진 성소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8).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후 아무 데나 두신 것이 아니라 '거기'로, 곧 에덴이라는 특정한 자리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고 기록된다.
에덴은 성경 안에서 단지 지리적 명칭에 머물지 않는다. 에스겔은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부르며 그것을 성전의 이미지와 겹쳐 놓고(겔 28:13-14), 이사야는 광야가 에덴 같이,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 같이 될 것이라 노래한다(사 51:3). 성경 여러 곳에서 에덴은 성산, 성소, 광야, 빈 들 등 여러 이름으로 변주되며 나타난다.
이는 에덴이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시는 자리, 곧 성소의 원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성소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서 있었다.
3. 예수, 그 성전이며 길이며 통로
이 성소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인격으로 다시 나타난다. 예수께서 성전을 가리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을 때,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고 해설한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성소, 곧 에덴 성소의 실체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에덴에 사람을 '데려다 두신' 것처럼, 예수는 사람들을 아버지께로 '데려가는' 길이요 통로가 되신다.
흥미롭게도 성막과 성전의 입구는 언제나 동쪽을 향했다(출 27:13-16).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도 "전의 앞면이 동을 향한지라… 물이 성전 문지방 밑에서 나와서 동으로 향하여 흐르더라"(겔 47:1)고 기록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향해 "내가 네 자손을 동편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편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사 43:5) 말씀하셨고, 예수께서도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말씀하셨다.
동쪽 문은 흩어진 자들이 다시 모여드는 방향이며, 동시에 에덴을 지키던 그룹들이 서 있던 그 방향이기도 하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쫓겨났던 그 동쪽 문으로, 이제 예수를 따라 다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4. 옆구리 ... 신부의 탄생과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예수의 물과 피
이 여정의 결정적 지점은 십자가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이 장면은 창세기의 또 다른 옆구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1-22). 아담의 옆구리에서 신부 하와가 나왔듯,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와 그의 신부, 곧 교회가 태어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1) 다시 열린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힌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휘장은 예수의 육체였다. 그 육체가 찢어짐으로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성막의 구조를 떠올려 보면, 성막 뜰에 들어서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에는 먼저 번제단이, 그다음 물두멍이 있었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출 30:18). 번제단에서는 피가, 물두멍에서는 물이 사람을 맞이한다.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나란히 서 있던 것처럼, 성막의 길목에도 피(번제단)와 물(물두멍)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 구조적 상응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이 둘, 곧 피로 상징되는 대속과 물로 상징되는 정결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베드로전서의 한 구절이 결정적인 실마리를 던져준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라"(벧전 3:21).
물두멍의 물이 씻어내는 것은 육체의 때가 아니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죄의 본질이 다시 정의된다.
죄란 단순히 육체적 더러움의 흠결의 목록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물에서 씻긴 선한 양심조차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지 않는 것, 곧 사람 자신의 열심과 사람의 방식, 곧 이방인의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번제단과 물두멍은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다른 얼굴이다.
사람은 그 앞에서 자기 기준의 선과 악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한 분 앞에 자기 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5. 예수와 임마누엘이란 두 이름
이 모든 여정은 결국 이름 하나로 수렴된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말했고, 곧이어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선포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번제단과 물두멍, 곧 피와 물로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분을 가리키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 구원의 목적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상태, 에덴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의 성취 를 가리킨다.
에덴의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한다.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계 22:1-2). 쫓겨났던 동쪽 문으로 다시 들어가, 그룹들이 지키던 그 길을 지나, 마침내 생명나무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성경 전체가 그리는 하나의 큰 이야기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정의하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부자 청년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6-17) 답하셨다.
영생은 사람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쟁취하는 업적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다. 그 앎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이며, 그 관계의 이름이 곧 임마누엘이다.
나가며, '생명나무'로 향하는 하나의 여정으로
위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보면, 창세기의 선악과와 요한복음의 창, 마태복음의 이름 하나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 에덴 성소에 두셨고, 그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함께 두셨다. 사람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려다 그 길을 잃었고, 동쪽 문은 화염검으로 막혔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영이신 자신과 육체가 된 사람 사이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온 화목제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정원 성소를 다시 세우셨다.
생명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간 예수의 육신은 하나님이 계신 성소를 가렸던 휘장을 찢고 길을 만들었다.
십자가에서 그의 옆구리가 찢어져 물과 피가 흘렀고, 그 물과 피는 성막의 물두멍과 번제단처럼 사람을 씻고 대속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씻음이 겨냥하는 것은 육체의 더러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마음, 곧 사람의 방식으로 선악을 재단하려는 옛 죄성이다.
그 길을 통과한 사람은 마침내 동쪽 문 저편, 다시 세워진 생명나무 앞에 선다. 그 나무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시작되고 완성된다.
십자가 예수의 옆구리를 통해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가듯, 우리도 신랑이 될 아담의 옆구리에서 탄생하는 여자인 하와처럼, 그 초대장을 따라 여정을 떠나보자.
*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8편, 유월절 저녁 예식과 십일조 '144,000', 그리고 예수와의 관계 속에 태어나는 '빛의 탄생'](/data/dlt/image/2026/07/24/dlt202607240002.160x96.0.png)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7편, 인류가 발견한 위대한 상수 파이와 성전 정결 작업 16일](/data/dlt/image/2026/07/23/dlt202607230001.160x96.0.png)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6편, 흠 없는 양을 준비하는 기간 4일](/data/dlt/image/2026/07/22/dlt202607220002.160x96.0.png)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5편, 동전의 역설을 통해 바라본 70이레 다음 해 '희년'과 '짐승, 사람의 수 666'](/data/dlt/image/2026/07/20/dlt202607200001.160x96.0.png)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4편, '70이레(49년)'와 물에서 끌어 올린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 수 153'](/data/dlt/image/2026/07/16/dlt202607160001.160x96.0.png)
![[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3편, 성전 측량 ...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data/dlt/image/2026/07/15/dlt202607150001.160x96.0.png)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