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5편, 동전의 역설을 통해 바라본 70이레 다음 해 '희년'과 '짐승, 사람의 수 666'

정진욱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7-20 07:35:00
▲ 종교와 기하학, 칼럼니스트 정진욱


동전의 역설 N+1을 통해 바라보는 희년과 회복

동전 하나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똑같은 크기의 동전 두 개를 탁자 위에 놓아보자. 하나는 고정하고, 다른 하나를 그 둘레를 따라 미끄러지지 않게 굴려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굴러간 동전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동전은 스스로 몇 바퀴 돌았을까?


직관적으로는 "1바퀴"라고 답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동전은 2바퀴를 돈다. 이른바 "동전의 역설(coin rotation paradox)"이다. 굴러가는 동전이 고정된 동전의 둘레를 한 번 공전하는 동안, 자기 자신도 한 번 더 자전하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반지름이 같은 두 원이 서로 바깥에 맞닿아 굴러갈 때 회전수는 'N + 1'이 된다. 반대로 큰 원 안쪽에 맞닿아 도는 작은 원은, 공전과 자전의 방향이 서로를 상쇄하기 때문에 회전수가 오히려 하나 줄어든' N − 1'이 된다. 

같은 굴림 운동인데, 바깥을 도느냐 안을 도느냐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의 부호를 갖는 것이다. 이 단순하지만 깊은 기하학적 사실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학적 묵상의 출발점이다.


밖에서 도는 원 'N+1 세계

항성일과 태양일일 기준으로 실제로 천문학에서 존재하는 +1의 세계가 있다. 이 원리는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천문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1년 동안, 태양을 기준으로 셈한 하루(태양일)는 약 365.25일이다. 그런데 저 멀리 고정된 별빛을 기준으로 지구의 자전을 세면(항성일), 그 횟수는 약 366.25일로 하루가 더 많다.

이는 동전의 역설과 정확히 같다. 지구는 자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그 공전 자체가 별빛의 기준에서 볼 때 자전을 한 바퀴 더 보태주는 셈이다. 

즉 "땅에서, 태양을 기준으로" 센 365.25일에 +1이 더해져, "빛(별)의 기준"에서는 366.25일이 되는 것이다. 우주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무언가의 바깥 둘레를 따라 도는 회전에는 언제나 이 +1이 따라붙는다.


▲ '희년', 일곱째 안식년 다음의 +1(PPT 생성)


희년, 일곱째 안식년 70이레 다음의 +1

하나님은 구약에서 형식적인 사람들의 예배로 인해 안식일과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를 폐하셨다.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호세아 2:11)

"성막을 동산의 포도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그 공회의 처소를 멸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셔서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예례미야애가 2:6)

동전의 역설에 등장하는 N+1의 원리를 성경의 절기로 옮겨보면, 안식일과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를 폐하면서까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절기,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한 해의 시작인 '희년'이 보인다. 

레위기의 희년 규례는 일곱 해씩 일곱 번, 곧 49년(7이레)을 센 뒤, 오십 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선포한다. 얼핏 보면 49에 그저 1년을 더한 산술처럼 보이지만, 이 칼럼이 주목하는 지점은 그 성격이다. 

하나님이 뿔나팔을 불어 선포하신 '희년'은 단순히 "49년 다음 해"인 오십 년째가 아니라, 모든 날의 첫째 날이자 새로운 절기,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한 해의 시작이다.

희년에는 땅이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가고, 빚이 탕감되며, 종이 자유를 얻는다. 이는 사람이 계산으로 만들어낸 순환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시공간에 친히 개입하실 때 생겨나는 +1이다. 

동전이 상대방의 바깥을 한 바퀴 돌 때 자기도 모르게 한 바퀴를 더 얻듯, 희년의 오십 번째 해는 인간의 계산 바깥에서 하나님이 더하시는 은혜의 한 바퀴다.

이는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하고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답한다(여호와이레).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도 결국 같은 '은혜'의 원리다. 사람의 계산과 준비가 끝나는 자리,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를 더하여 채워 주신다. 인간의 방식으로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더해지는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다.


▲ 시공간 안에 갇힌 N-1인 수 '666'(PPT 생성)


짐승과 사람의 수 666 ... 시공간 안에서 도는 원 'N−1'의 세계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요한계시록 13: 18)

사단이 갇힌 시공간, 동전의 역설이 보여준 또 하나의 의미를 기억하자. 

큰 원의 안쪽에 맞닿아 도는 작은 원의 회전수는 N−1이다. 바깥을 자유로이 도는 원과 달리, 안쪽에 갇힌 채 도는 원은 오히려 '은혜'라는 한 바퀴를 잃는다.

우주를 상징하는 큰 공간 안에 갇힌 시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을 뜻한다. 

완벽한 사방을 뜻하는 입체인 구(球)의 겉넓이를 구하는 산술식에서 "πR²"이 하나가 부족하다. 

이는 에스겔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방(四方)"의 완전수 4에서 하나가 빠진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쉽다.

온전한 넷이 아니라 셋만 남았을 때, 구(球)의 겉넓이 공식 4πR²은 온전함을 잃고 3πR²에 머문다. 하나가 빠진 자리, 위에서 말한 바 같이 더해진 하나님의 '은혜'가 빠지고, 완벽한 입체마저도 그려내지 못하는진 그것이 바로 이 칼럼이 말하는 N−1의 형상이다.

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창조의 7일 안에 갇힌 회전, 입체인 말씀이 육신을 입은 예수의 형상에서도 하나가 빠진 사방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요한계시록의 "사람의 수" 666으로 이어진다. 

완전을 상징하는 수(數)에 못 미치는 결핍의 세 번 반복(6, 6, 6)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안쪽에서 돌며 스스로 하나를 잃는 N−1의 회전과 같은 결을 이룬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다서 1:6)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베드로후서 3:7)

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전하는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된" 공간, 흑암에 가두어 둔 천사들의 처소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더하신 '은혜'가 단절되고, 말씀이 육시을 입은 입체인 예수 그리스도형상에도 못미치는 결핍, 시공간 안에 갇혀 하나를 잃는 회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시공간 안에 갇힌 사단의 기하학적 형상이다.


동전의 역설, 그 두 회전이 말해주는 것

정리하면 이 묵상의 구조는 이렇다. 큰 우주라는 시공간과 맞닿아 회전하는 원이 단절과 담장을 허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시공간에 '은혜'를 더한 N+1의 희년, 그리고 항성일,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 시공간 안쪽에 불태워지기 위해 간수된 N−1이 가르키는 '666'과 흑암에 갇힌 천사들

같은 동전, 같은 굴림 운동이지만 위치가 바깥이냐 안쪽이냐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다. 

이 칼럼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갇힌 시공간에 하나님이 친히 더하시는 은혜 +1이 온다. 

희년은 그 +1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뿔나팔을 불어 선포하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절기다. 

땅은 원주인에게, 빚진 자는 자유로, 종은 해방으로, 멸망해 그 민족마저 흩어져버린 북이스라엘처럼 "사람들이 정한 예배방식이 아닌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제5편을 마치며

동전 하나를 굴려보는 단순한 놀이가, 우주의 항성일과 태양일의 차이를 설명하고, 나아가 희년의 신비와 심판의 형상까지를 비추어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글은 수학적 사실(동전의 회전 파라독스, 항성일과 태양일의 차이)과 성경적 절기·상징(희년, 여호와이레, 666, 에스겔의 사방)을 하나의 은유적 틀로 엮어본 신학적 묵상이다. 

독자마다 이 상징을 받아들이는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질문은 함께 필자가 남기고 싶다. 

"나는 지금, 시공간에 더해지는 은혜의 회전 위에 있는가, 아니면 불태워지기 위해 간수된 시공간 안에 갇혀 신을 잃어가는 회전 위에 있는가."


*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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