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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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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희 문화 칼럼] 가수 박진영은 정말 사이비인가
    문화/생활

    [이광희 문화 칼럼] 가수 박진영은 정말 사이비인가

    최근 들어 가수 박진영 씨에 대한 기존 한국교회의 날 선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왜 한국교회는 이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서 박진영 씨가 운영하고 있는 (사)첫열매들이라는 곳에 관하여 알아보았고,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대부분의 설교 내용을 들어봤다. 내용은 비교적 무난했는데, 신학 공부를 상당히 오랜 기간 열심히 한 것을 설교 내내 알 수 있었고 그의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첫열매들은 어떤 곳인가 박진영 씨가 운영하고 있는 (사)첫열매들은 2023년 10월에 문체부로부터 정식 비영리 종교법인으로 인정받고 등록한 사단법인이었으나 박진영 씨 자신이 대표로 등록한 법인체는 아니었다.종교법인이 하는 일은 정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사)첫열매들 측이 법인 등기에 기재한 목적 사업을 보면 성경 세미나, 특별 강연을 통한 전도 사업, 선교를 위한 출판 사업 그리고 기타 목회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사업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즉 단순한 성경 모임 단체가 아니다. 예전에 박진영 씨가 작은 성경 모임을 시작하며 사람들에게 강연할 때만 해도 주위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종교에 관심이 있나 보다. 또는 다른 여타 연예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구나, 아마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기존의 한국교회나 교단에서도 작은 성경 모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작은 모임이 하나의 교단 형태를 이루고 있고 정식으로 종교법인 등록까지 하고 활동하고 있기에 한국교회는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왜냐하면 상대는 스타 박진영이다. 박진영 씨가 신학대학을 다녔다면 이미 언론에 공개가 되었을 텐데, 한 번도 그런 뉴스나 기사는 없었다. 정식 신학 공부를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기독교가 보는 관점이나 교리에는 맞지 않는데, 설교는 단순하게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간증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말들이 많은 것이다.정식 신학대학 혹은 대학원을 나오지 않으면 설교할 수 없나한국에 200개가 넘는 개신교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단이 다 같은 교리와 규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는 목회자가 하는 것이 보편적이며 목사가 부재중일 경우는 대신해서 전도사나 강도사가 설교하기도 한다. 또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도 목사가 없는 지역에서는 설교를 대신하곤 하는데 이처럼 목사가 부재중이거나 없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목사가 설교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사가 아닌 박진영 씨가 설교하는 것을 기존의 교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목사가 아닌 사람이 설교하면 안 되는지 이와 관련해서 성경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먼저 구약시대를 살펴보자면 지금의 목사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구약 시절에는 제사장만 말씀과 율법을 전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구약시대에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하며 말씀을 전한다. 아모스는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그는 목축하며 뽕나무를 재배하던 사람이다. 즉 구약시대도 정규 교육을 받은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절대 원칙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왜 지금의 한국교회는 목사 이외의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금기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설교할 경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단이나 사이비들의 공통점을 보면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한 사람이 드물다. 한국교회가 박진영 씨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이는 이유 한국교회가 박진영 씨에 대한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어서 왜 그런지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바로 삼위일체에 관한 박진영 씨의 이의 제기 때문이다. 박진영 씨는 자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삼위일체는 잘못되었다,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이고, 셋이면 셋이지 하나인데 셋은 도대체 뭐냐?” 이와 같은 이의 제기는 개신교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고, 앞으로도 더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지금도 신학자 간에는 의견이 분분하며 목사들도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것을 아주 강한 어조로 이의 제기했기 때문에 개신교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즉 개신교에서 가장 민감해하는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그런데 필자는 박진영 씨의 이의 제기를 충분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필자도 신학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삼위일체가 가장 모호한 부분이라서 신약학 교수님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매우 날카롭게 여쭤봤는데, 당시에 처음으로 교수님이 난감해하시면서 한참을 고민하시다가 어떠한 책을 추천해 주셨는데,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필자가 스스로 답을 얻게 하셨다. 만약 학교가 아닌 교단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면 분명 믿음에 대한 문제 그리고 옳지 못한 사상 등 여러 가지를 의심받으며 주의할 인물로 낙인이 찍혔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는 아멘만을 외치는 곳이 아닌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받는 아카데미이다.즉 학교는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은 묻고 토론하는 곳이지 무조건 믿음을 강요받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박진영 씨가 그토록 모호하다고 한 삼위일체는 대체 무엇인가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누구라도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의문을 품게 된다. 성부는 하나님 아버지이고 성자는 그의 아들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격이 다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위치가 있는 것인데 왜 하나로 묶었을까?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살아 있던 초대교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당시 예수님은 많은 활동을 하시면서 엄청난 이적과 기적을 보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하나님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신봉하며 따르는 세력이 많아지자,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매우 난감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 시절부터 유일신 즉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고 나와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고부터는 하나의 신이 더 생겨났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이때부터 예수님을 신으로 보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뉘게 되었고 예수님을 신으로 보더라도 과연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냐는 문제 제기로 이어졌으며, 이에 관한 상당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며 문제 제기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이 4세기에 신학자이자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 256-336)이다. 논의는 계속되었고 결국 325년 니케아 공의회 때 정식 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드디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거의 확정을 짓는다. 이때 하나님과 예수님은 물론 성령까지 하나로 묶어서 “삼위일체”가 확립하게 된다. 즉 삼위일체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후대의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박진영 씨는 사이비인가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박진영 씨는 이단도 아니며 사이비는 더욱 아니다. 박진영 씨가 운영하고 있는 (사)첫열매들의 교리 또는 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면 기존의 정통 개신교와는 조금 다른 것은 사실이다. 얼핏 보면 장로교 쪽과도 비슷하고 감리교 쪽의 교리와도 비슷하다. 즉 여러 교단의 교리가 조금씩 섞여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교단과 다르다고 해서 이단 또는 사이비로 몰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사실 가장 많은 신자(信者)가 있는 하나님의 성회 즉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당회장 목사님이었던 故 조용기 목사님도 초기에는 상당한 이단으로 몰렸던 것을 개신교 내에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단은 고사하고 한국과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부흥된 교회이며 많은 기독교적 사역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몸으로 실천하는 교회로 거듭났으며, 명실공히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박진영 씨가 무엇이 다른가20세기 최고의 설교자를 꼽으라면 단연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다. 이 목사님의 설교가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냐면 금요일 저녁 예배에 보통 2천 명이 넘는 신자가 몰려든다. 영국의 금요일 문화는 한국의 불타는 금요일과도 같은데 이날은 지인과 먹고 마시든가 아니면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가진다. 그 황금 같은 금요일에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는 자리가 없다. 더 믿기 힘든 일은 이분은 본래 목사가 아니었고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다. 런던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다가 어떤 심경 변화에 의해서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했으며 설교자로서 대중 앞에 나선 분이다.그렇다면 박진영 씨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뭐가 다른가?사람들은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박진영 씨가 조그마한 성경 공부 모임을 할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종교법인을 세우고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교회라는 명목으로 활동을 하니까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단순한 교회를 뛰어넘어서 전국에 8개의 지교회가 있는 교단으로 발전하자 이단 사이비로 몰아가면서 날 선 비판을 하고 있다. “박진영 씨가 무슨 사이비 짓을 했는가?”사이비 교단의 공통점을 보면 이상한 교리를 내세워서 영리를 목적으로 돈을 거두어들인다. 박진영 씨가 영리를 목적으로 돈을 거두어들이고 있나?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돈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그가 설교할 시간에 콘서트를 열든가 아니면 자신의 회사 즉 소속사 가수들의 공연을 기획하면 오히려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싶다.필자가 보기에는 박진영이라는 사람은 현재 신앙에 진심이다. 한국의 개신교 교단이 (사)첫열매들 박진영 씨의 신학적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검증하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삼위일체와 구원론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므로 이와 관련해서는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신학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과 사이비로 몰아가면서 동일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교리적 비판은 세밀한 성경 해석과 신학적 검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상대측의 주장도 존중하고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필자도 박진영 씨의 모든 신학적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성경 연구와 종교 활동 전체를 부정하는 태도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기존의 한국 개신교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교단의 권위만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와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 물론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근거 없이 낙인찍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며 실천의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친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칼럼니스트 개인 의견이며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10-09 19:02:20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아시안게임 병역 특례 이대로 괜찮은가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아시안게임 병역 특례 이대로 괜찮은가

    제20회 하계 아시안게임이 모든 경기를 마치고 14일간의 행사를 마무리했다. 일본 아이치현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한국으로서는 많은 부분이 아쉬운 행사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메달 성적과 그 성적에 따른 군 면제 혜택에 관한 부분이다. 이번 아이치현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3위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얼핏 봤을 때 아시아에서 3위면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한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까지 8회 연속 50개 이상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런데 이번 아이치현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성적 그 자체는 3위이지만 메달은 금 39개로 44년 만에 가장 적은 금메달 획득이다. 물론 선수가 경기하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성적이 아니라 선수들의 태도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약 70년 동안 휴전(休戰) 중인 국가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국방의 의무를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몸에 장애가 있거나 군에 갈 수 없는 그에 맞는 사정이 있는 경우는 면제받는다. 예를 들어 경제 사정이 어려워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1년 6개월 이상 수감 생활을 한 사람, 즉 징역이나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군에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명확한 사유가 아니면 군에 가서 복무를 마쳐야 한다. 체육 분야 병역 특례는 면제가 아니다 체육 분야 병역 특례를 정확하게 짚어보자면 면제가 아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 이상 또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경우 그 분야에서의 우수성을 인정받아서 4주간의 군사 기초 훈련을 받고 계속해서 체육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게끔 만든 제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국위 선양을 해서 면제받는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국위 선양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의 위엄이나 명성을 널리 알린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국위 선양으로 나라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군 병역 혜택을 받는다면 방탄소년단(BTS)은 제일 먼저 군 병역 혜택을 받아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멤버 중에 단 한 명도 병역 혜택을 받지 못했고, 그룹의 맏형 진을 시작으로 제이홉, RM, 뷔, 슈가, 지민, 정국까지 모두 병역의 의무를 마쳤다.방탄소년단의 인지도는 단순한 가수의 위상을 뛰어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문화•외교적 영향력이 가히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이들은 UN 총회에 정식으로 초대받아 연설하는가 하면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백악관에서 아시아계 반 인종차별에 관한 회담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영국의 보리스 총리의 딸이 방탄소년단의 팬이라서 자신도 자기 딸이 그토록 좋아하는 방탄소년단을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한국의 주요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로 방탄소년단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가수이자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국위 선양의 대명사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두 군복무를 마쳤고 멤버 중에는 자원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친 사람도 있다. 이들만큼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체육 특기를 가진 운동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흘린 소중한 땀, 그 땀의 대가가 메달 획득으로 이어졌을 때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그 기쁨과 희열은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인터뷰에서 마치 혐오 장소에 가기 싫은 사람처럼 안 가게 되어서 너무 좋다는 뉘앙스를 비추고 메달도 영광도 다 필요 없고 오로지 군 문제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는 발언은 국민이 분노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각에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군에서 복무하는 장병들이 있고 항상 노심초사 걱정하는 가족들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북한이 매설한 지뢰로 인해서 약 8명이 부상을 입고 영관급 장교인 수색대대장은 다리가 잘려 나가는 가슴 아픈 일이 불과 며칠 전에 있었다. 그런데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체육 분야 병역 특례, 재검토 대상이 될 수도 있다한때 군 제대자는 공무원 시험 볼 때 가산점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군복무를 하고는 가산점을 받는 것이 대중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고 특히 여성과 차별한다는 여론이 들끓자, 얼마 못 가서 제도가 폐지됐다. 필자가 왜 이런 이야기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냐면 지금의 여론이 그 당시와 매우 비슷하다. 또한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당연하며, 즉 자기 최고의 영광일 뿐이지 그것으로 병역 혜택까지 받아야 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문제다. 앞으로 체육 분야 병역 혜택 문제가 계속해서 대두된다면 머지않아 재검토 대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물론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의 여론과 사회 분위기를 본다면 조만간 바뀌지 않을까 예견하는데, 만약 바뀐다면 체육 특기를 가진 선수들이 스스로가 자기의 무덤을 판 것이므로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앞으로 한국 스포츠사에 이번과 같은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10-05 22:20:11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탈종교 시대에 무너져 내리는 종교 문화  2편,  "부흥이 필요한 개신교"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탈종교 시대에 무너져 내리는 종교 문화 2편, "부흥이 필요한 개신교"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부흥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개신교는 절실하게 다시 부흥이 필요한 상황임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기존의 신자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떠나고 교회의 중심축인 집사나 권사도 이제 나이가 50세에 접어들었거나 넘었다. 앞으로 빠르면 10년 늦어도 15년 사이에는 정년을 맞이하고 이들도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니 신자들이 하는 헌금으로 유지하는 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들을 대신해서 배턴을 넘겨받을 허리 세대 즉 20~30대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교회에는 20~30대의 수가 매우 적거나 거의 없다. 출생률이 현저하게 낮고 학령인구가 감소한 탓에 그 충격을 교회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고 뚜렷한 대안이 없으면 앞으로 작은 교회 목사는 주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중에는 알바를 하거나 전혀 다른 일을 찾아서 구슬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머지않아 온다. 원칙적으로 목회자는 겸직할 수 없다. 대부분의 교단이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러나 겸직을 허용하지 않게 되면 회사가 줄도산하듯 하루가 멀다고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고 앞으로 살아 남을 교회는 절대 많지 않을 것이 불 보듯 훤하다. 주위에서 대중들은 현재 개신교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현직에 있는 사람만이 그 고충을 안다.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도 불과 10년 전에 비해서 크리스천이 반 이상 줄었고, 영국의 유명한 몇백 년 역사가 있는 교회도 매물로 나와서 대형 서점이 되거나 나이트클럽 즉 술집으로 바뀌는 충격적인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개신교의 시작이었던 독일의 교회에도 주일 날 사람이 없고 텅 비어 있어 이게 맞나 싶은 정도이다.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개신교, 이와 같은 어려움은 하루아침에 해소되기는 어려운 듯한데 도대체 어떻게 이 국면을 이겨 나가야만 할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예전 같은 부흥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지를 하려면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고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으로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국내에서 초기의 개신교가 메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예전의 개신교는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제일 먼저 앞에 나서서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고 사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돕고 그들이 아프면 같이 아파했다. 지금의 개신교는 어떠한가....개신교의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9-14 15:03:56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탈종교 시대에 무너져 내리는 종교 문화 1편, '개신교 이대로 괜찮은가'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탈종교 시대에 무너져 내리는 종교 문화 1편, '개신교 이대로 괜찮은가'

    필자는 명상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어쩌면 삶의 가장 큰 부분이고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늘도 기도하고 명상에 잠기다 잡생각이 나서 눈을 뜨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변화” 때문이었다. 이 사회는 급변하고 있고 그 변화의 물결에 맞추어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사람들은 몸부림을 치는데, 변화의 물결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사람들은 적응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변화가 빠르다고 하지만 그 빠른 변화에 사람들의 적응도 상당히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응이 쉽게 안 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종교다. 특히 기독교의 빠른 변화, 아니 몰락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서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1882년에 있었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기 때문인데, 공식적인 외교 통상 관계가 맺어졌으므로 두 목사는 공식적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당시 고종황제가 기독교를 정식으로 허용한다고 밝힌 것은 아니다. 단지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 등의 형태로 활동하다가 활동 범위를 자연스럽게 넓히면서 개신교 선교가 본격화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못마땅했을 것은 당연하다. 주자학을 통치 이념의 근본으로 여겼던 조선이 유교의 큰 바탕 아래 주자학 즉 성리학을 앞에 내세워 모든 이념과 흐름이 이어져 내려왔다.개신교의 종교적 형태의 활동은 단순한 포교를 넘어서 성리학적 이념에 반하며 사회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매우 난처했는데, 그런데도 모든 것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서양식 선진 의료와 교육 그리고 과학기술이 당시 조선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근슬쩍 받아들여진 개신교는 조선에 없던 현대식 병원을 세워 사람들을 치료했고, 학교를 건립하여 가르쳤으며 조선이 근대화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나라가 돌보지 못한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주었기에 민중이 개신교에 빠르게 동화되었으며 그사이에 개신교는 굳건하게 자리 잡았고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후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을 시작으로 개신교는 엄청난 세가 확장되고 일제강점기에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민족운동에 동참하면서 매우 중요한 축을 담당했었고, 3.1운동을 하는 중심인물의 절반가량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중대한 일에는 기독교인이 빠지지 않았으며 그 영향력도 상당했고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주축이 되어 빠른 성장세를 보이다가 70년대에는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대형 교회로 발돋움하는데 그 대표적인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또한 70년대에서 80년 초까지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교회도 같이 성장하였고 한국에서 개신교는 손에 꼽는 메인 종교로 자리매김한다. 1990년대 개신교는 국내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해외로 선교사를 파견하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선교사를 공식 파견한 적도 있고 일부 교단이나 단체 혹은 교회에서 선교사를 보내 활동했지만 극히 일부였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은 1980년 후반부터 1990년 초반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개신교가 들어온 역사가 매우 짧은데도 빠른 성장과 부흥으로 인해서 해외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고, 기독교인은 날로 증가했으며 거리에는 흔하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 초반까지 계속됐고, 한국교회는 성장을 거듭했다.개신교는 왜 쇠퇴하는가교회가 많아지자 경쟁은 심했다. 단순한 교회 간의 경쟁도 경쟁이지만, 교단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현재는 200개가 넘는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정식으로 인허가받지 않은, 즉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기독교 관련 대학이나 대학원 학과에서 공부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교육하고 목사를 양성하고 있어서 교육 기간이나 프로그램도 제각각이며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그로 인해 문제가 하나둘씩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교단은 이를 은폐하거나 목사 개인의 일탈 정도로 문제를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또한 헌금으로 인한 문제도 끊임없이 발생했으며 교회 내의 파벌도 대중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2020년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을 때 기독교인에 의한 대중의 신뢰는 완전하게 무너졌는데 확진자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자, 정부는 방역 차원에서 거리두기를 시행했고 더 나아가서 집합 금지를 실행했는데 타 종교는 정부의 지시에 따르고 협조적이었다. 예를 들어 대한 불교 조계종 같은 경우에는 사회적 거리 2단계에 돌입하자 종교 행사 인원을 제한하거나 취소했고, 통도사는 증법회와 불교 의식(예불, 염불)을 전면 금지하고 예불문도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 등 정부의 행정명령에 적극 협조했다.천주교도 정부의 방역 관련 조치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연중행사 중 사순절과 부활절을 방송으로 대신했으며 추기경이 직접 나서서 천주교회 전체가 정부의 방역에 적극 협조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원불교도 코로나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여 교단 내 모든 법회를 중단하고 행사를 취소 또는 연기하였고 방역용품 및 코로나 확산 예방에 관한 성금을 모금하여 정부에 전달하는 등 종교단체로서의 모범을 보였고, 대순진리회도 참배와 교화, 치성 기도 등 모든 집회를 전면 금지하며 정부의 방역에 적극 협조했다.하지만 개신교는 달랐다물론 개신교도 순응하는 교단도 있었지만, 반대로 집합 금지는 “종교 탄압”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며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행정 명령을 따르지 않은 교회도 많았다. 그 결과 천안의 한 교회는 대면 예배 후 다 같이 모여 김치를 담는 등 공동 모임을 강행해서 231명이 집단 감염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서울의 한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대면 예배를 진행하여 약 1,000명이 넘는 신자가 감염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로써 개신교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은 거세졌고,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 사태 하나만으로 개신교가 침체의 늪에 빠지고 지금의 지경까지 왔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개신교는 그 전부터 여러 가지가 문제가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곯아 있다가 터진 것이다. 게다가 예전보다 삶이 풍요로워져서 간절함이 사라진 것도 큰 원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즉 어렵고 못 살 때는 뭔가에 기대어 간절하게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삶이 윤택해지고 나서는 간절함도 사라지고 뭔가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어졌으며 가난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집념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풍요 속에서 오는 나태함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까? 그렇게 신자들은 하나둘씩 교회를 떠났고, 젊은이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으며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다.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야 빈자리가 채워질 텐데, 나가는 사람만 있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교회는 재정적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으며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교회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한국교회가 현재 상황을 이겨내고 다시 부흥을 맞이 하는 것은 힘을 것 같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9-14 07:26:55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너무나 달라진 병영 문화 ... 2편, '강군 육성'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너무나 달라진 병영 문화 ... 2편, '강군 육성'

    국방부가 CCTV로 대체 경계가 가능한 부대에 한해서는 종전에 야간 불침번 제도를 운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불침번은 야간에 1~2시간 정도 병사들이 생활하는 생활관 건물 내부를 순찰하면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근무를 말한다. 이러한 근무 체계를 CCTV로 대체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병들에게 매우 반가운 희소식이다. 왜냐하면 불침번 근무를 하면 자다가 도중에 일어나야 해서 깊은 잠을 자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러므로 불침번 근무가 폐지가 된다면 아마도 군 생활이 한 층 편해지고 더욱 살맛 나는 병영 생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려가 되는 점도 있는데 당직사관이 CCTV로 생활관 전체를 모니터링 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고, 계속해서 아침이 되기까지 확인하고 관찰한다는 것도 무리다.한국은 현재 휴전 상태이다, 종전(終戰) 국가가 아니다한국은 징병제로 운영 중이며, 군대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 복무제를 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에 하나다. 전 세계의 나라 중에 의무복무는 한국과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와 이스라엘이 있다. 이 중에 정말 무력 충돌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이고 한국도 국지전이 간혹 발생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1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사건이다. 물론 이 외도 DMZ 부근에서의 작은 충돌과 도발까지 이야기한다면 한국도 솔직하게 절대 안전한 상태는 아니다. 게다가 북한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땅굴을 파고 있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현재까지 발견한 땅굴만 4개다. 그러므로 한국군이 강해야만 하고 절대 약해서는 안 된다.세월이 지나 병영 생활도 많은 변화가 있는 듯하다. 또한 병영 생활에 있어 악습과 관행이 개선되고 복무 환경이 날로 좋아지는 것을 주위의 지인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군대는 군대다. 즐겁고 살맛 나는 병영 생활도 좋지만 일정한 선은 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군대는 그 선을 넘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불안하기도 한데, 왜냐하면 군이라는 조직은 일반 사회의 조직과는 다르게 무기라는 것을 다루는 특수한 조직이라서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또한 막강한 군사 조직과 강한 장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훈련과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기술력이 발달해서 최첨단 무기를 양산하여 전투력은 상승했으나 장병들이 너무 나약한 것 같아서 매우 우려가 된다. 군이 존재하는 이유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단 한 번의 전쟁을 대비하고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이 날이 갈수록 편한 것을 추구하여 나약해진다면 극한 상황이 초래하여 전쟁이 났을 때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는 자식이 고생할까 봐서 항상 노심초사다. 그러므로 점점 좋아지는 군 내부의 시스템에 흡족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국가안보가 불안해질 수도 있다. “싸우려고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9-08 23:28:02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너무나 달라진 병영 문화 ... 1편, '군 기강 확립'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너무나 달라진 병영 문화 ... 1편, '군 기강 확립'

    1995년 5월 2일 부모님께 큰절하고 의정부에 있는 102 보충대를 향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어머니가 필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사진 한 장을 건네셨다. 다름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필자가 함께 이촌동에 있는 충신교회 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필자의 집안은 신실한 크리스천 집안이라서 아버지가 입대하는 날 기도를 해주셨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내렸고, 그날 가족이 다 같이 너무 많이 울었는데, 어디 죽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입대하기 전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다더라, 할 만할 거야”지인들의 말대로 할 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너무 낯설고 정말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욕을 듣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었고 구타와 가혹행위는 일상이었다. 그나마 손으로 맞으면 다행인데 소총 개머리판으로 맞기도 하고 박달나무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진지공사를 하다가 삽으로 맞아서 머리가 터지는 일도 있었다. 요즘 군대에서는 들어보기 힘든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구타가 정말 심했고, 그로 인한 탈영 사고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도 당시 환경이나 분위기나 흐름이 그러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군 생활을 했지, 그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려웠으며 행여나 소대장이나 간부들에게 이야기하면 나중에 선임병에게 오히려 더 심하게 맞거나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기에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실제로 필자의 동기가 구타와 가혹행위에 견디다 못해 소대장에게 면담을 신청하여 이야기했더니, 다음 날 선임병이 동기를 불러서 하는 말이, 이등병이 군기가 빠져서 선임병 때문에 힘들어서 군 생활을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냐며 좀 더 강하게 군기를 잡으라는 소대장님의 지시가 있었다면서 그 더운 여름에 땅에 머리 박고 30분간 있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결국 동기는 관심사병으로 전락했고, 선임병의 눈 밖에 나서 소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취사병으로 빠졌다. 참으로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이와 같은 관행이 비일비재했으며 당시 군대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비슷했다.너무나 달라진 병영 문화주변에 보면 지인이 아들 군대 면회를 하러 간다거나 아니면 휴가 와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간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서 무심코 들어보면 군대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좋아져서 믿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개 사병 월급이 15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제 정확한 급여가 맞는지 국방부 인사혁신처 보수 규정을 살펴보았는데 지인이 말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필자가 군 생활을 하던 시절의 병장 급여는 고작 12,000원이었고 이등병은 8,000원 정도였다. 그나마 필자는 사단 직할 수색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생명 수당과 특별 수당이 나와서 다른 부대 일반 보병들보다 조금 더 받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20,000원을 넘지 않았다. 물론 젊은 나이에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군에 들어가 고생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대우를 해준다고 볼 수도 있으나 현재 물가를 생각하고 당시 최저임금을 생각해 봤을 때 과연 맞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쓰인다. 즉 95년 당시 최저임금은 1,120원이었다. 2026년 현재 최저임금 10,320원이다. 약 10배 정도 임금이 인상된 것인데 사병의 급여는 무려 150배가 인상됐다. 문제는 사병은 의무복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부사관은 직업군인데도 생각보다 급여가 많지 않고 하사 초봉이 213만 원 정도라서 사기가 저하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된다. 급여는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내무 생활이다. 예전에는 내무반이라고 해서 내무 생활이라고 했지만, 현재는 생활관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병영 생활이라고 하는데 병영 생활을 하면서 구타 가혹행위가 문제가 되어 이러한 악습을 근절하기 위한 군에서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지금은 거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못 하게 하고 엄하게 단속하자 역으로 기강이 너무 해이해진 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말을 해서 후임병이 느끼기에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처벌 대상이 된다. 실제로 후임병이 운동해서 가슴 대흉근에 펌핑이 된 것을 본 선임병이 “야 너 근육 좀 나왔는데” 라고 툭 찔렀는데 그 행위로 징계받았다.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주말에 밥을 먹기 싫으면 저녁에 영외로 나가서 돈가스를 먹거나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온다는 말을 듣고서는 군대가 이렇게까지 변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한창나이에 먹는 것을 잘 먹어야 하니까 사병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과 끝나고 나면 휴대폰으로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통신 보안은 물론이고 부대 위치와 구조 모든 것이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은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더 심각한 것은 부모님이 중대장에게 우리 아들이 발목을 접질려서 아프다는데 이번 훈련을 좀 빼주면 안 되겠냐는 전화를 한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군 소속 A 사병이 여성 간부에게 같이 놀자고 했다고 5일간의 군기 교육 처벌을 받았는데, 이 일로 제대가 늦어져 사병이 복무기간 연장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았다며 취소 행정소송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패소했다는 최근 일간지 사회면 기사를 보고는 정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임병에게 하기도 힘든 말을 간부에게 한다는 것은 현재 군이 얼마나 기강이 해이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군대는 군 기강 확립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2편에 계속]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9-08 07:23:08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유술(柔術)이란 명칭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생활문화 일반

    [이광희의 문화 칼럼] 유술(柔術)이란 명칭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요즘은 20~30대 암 발병률이 생각보다 높아서, 이제 건강은 젊을 때부터 신경 쓰고 하나의 루틴처럼 관리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보다 술 소비율이 적어지고 저녁 시간대에 스포츠 짐이나 무술 도장(道場)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젊은이를 쉽게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주로 마니아들이 수련하던 것이 점점 입소문을 타고 퍼져서 이제는 제법 수련 인구가 늘어가고 있는 무술이 있는데 바로 유술(柔術)이다. 최근 유술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아마 브라질리언 주짓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브라질리언 주짓수와 유술은 다른데, 예를 들어 개구리와 맹꽁이가 비슷하지만 같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유술과 주짓수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무술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면 구분하기가 어렵고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우선 유술은 검(劍)의 동작을 그대로 맨손 무술 즉 체술(體術)에 대입하여 만들었다. 옛 무사(武士)가 검으로 대결하다가 검을 놓치거나 빼앗겼을 때 맨손으로 적을 상대하며 상대를 던지고 꺾는 기술이 유술이라면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일본의 마에다 미쓰요 유도 사범이 브라질에 가서 유도 기술을 가르친 것이고, 체질적으로 매우 유연하고 부드러운 브라질 사람에게 맞게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이 브라질리언 주짓수이다.1895년 17세의 나이로 강도관 유도에 입문한 마에다는 빠르게 성장하여 1901년에 3단에 승단하고 학교에서 유도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1904년부터 유도의 정립자 가노 지고로가 자신의 유도를 전 세계로 퍼트리고 알리기 위해 제자를 파견하는데 마에다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마에다는 중남미를 거쳐 1914년에 브라질에 도착해서 벨렝, 리우데자이네루, 상파울루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유도를 가르쳤다. 이때 카를루스 그레이시를 제자로 삼아 강도관 유도를 지도했고, 그레이시가 자신이 배운 것을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가르치면서 브리질리언 주짓수가 탄생하게 된다. 유도 기술은 선기술에 중점을 많이 두지만 주짓수는 유도에서 말하는 굳히기 기술 즉 그라운드 기술에 더 많은 중점을 둔다. 또한 지금은 하체 관절기 기술이 금지된 유도와는 다르게 주짓수는 하체 관절기 기술을 자유롭게 구사한다.유술의 시작은 언제인가?유술의 시작은 언제인가? 유술의 시작은 정확하게 언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의 백제가 주로 사용한 군사 무술이라는 것을 필자가 약 25년 동안 많은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밝혔고 2편의 논문을 통해서 발표한 적도 있으며 책으로도 <진짜 무술 이야기> 출간했다. 이러한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유술은 무사가 검을 놓쳤을 시 맨손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하면 다 유술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유술이 성립되려면 우선 관절 기술과 던지기 기술이 주를 이루어야 하며 이러한 기술은 검을 사용하는 동작과 일치해야 한다.따라서 유술이라고 정확하게 말하려면 백제 무사가 구사하던 검술 동작이 내재해 있어야 하며 이 동작은 검술(劍術)이나 체술(體術)이나 즉 칼을 쓰는 기술이나, 맨손 무술이나 그리고 장술(杖術)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몸동작이며, 같은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유술이다.하지만 국내에서는 정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며 유술이 아닌데 단지 단어만 차용해서 유술이라고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유술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나?유술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유술이란 말은 16세기에 일본에서 처음 시작됐다. 또한 같은 시기에 야와라(柔)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글자 그대로 부드러움을 강조했는데, 부드러움 안에는 강함이 내재해 있으므로 그 강함을 발산하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야만 했다. 그러므로 강함은 곧 부드러움이고 강함을 강함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고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상대하여 제압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능제강(柔能制剛)이며 유술의 원리다.이러한 유술은 16세기에 검술로 명성 있는 세키구찌류에서 처음 유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세키구찌(関口)의 가문(家門)도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이며 시조는 이마가와 씨(今川氏)이고 청화 원 씨의 후손이자 원의가(源義家)의 자손이다. 원 씨는 13세기 가마쿠라 바쿠후(幕府)를 세우고 무사 정권으로 나라를 다스린 최고의 사무라이 가문이라는 것을 필자가 앞선 칼럼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다. 세키구찌 가문의 사람은 최고의 사무라이 가문의 자손이고 검술과 유술로도 유명했으며 현대 유도의 정립자인 가노 지고로가 유도의 형(形)을 만들 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키구찌 가문에 의해서 유술이라는 무명이 사용되어지면서 유술은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했으며 더 폭넓게 퍼져 나갔고 많은 분파가 생겼다. 또한 이후 합기도 같은 지금의 호신술로도 만들어진 것이다.지금까지 유술의 역사 그리고 명칭이 처음 사용되어진 시기에 대해서 알아봤다. 유술은 우리의 선조가 군사적인 병법 즉 무술로 사용하던 것이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서 더 폭넓게 전해진 것이고 유술이라는 무명(武名)도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인 세키구찌 가문에 의해서 사용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즉 유술은 우리 선조의 병법이자 나라를 지키는 군사 무술이었고 오늘날까지 전해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위의 문헌을 보면 유술발명(柔術發明)은 도쿠가와 때 세키구찌 쥬우신(関口柔心)이 시작했고, 그 후 기슈(紀州)의 다이난고(大納言)로 임명되어 야와라(やわら)와 유술(柔術)로 명(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9-03 20:10:28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 문화 칼럼] 음식 문화, 요식업의 현주소 ... 주방으로 몰리는 MZ세대
    문화/생활

    [이광희 문화 칼럼] 음식 문화, 요식업의 현주소 ... 주방으로 몰리는 MZ세대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만 해도 주방에 들어가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남자가 왜 주방에 기웃거리냐고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그러다가 2009년 쯤 혜성처럼 나타난 “에드워드 권”이라는 두바이 5성급 호텔 총괄 부주방장이라는 이력을 가진 사람이 등장했는데, 인물도 수렴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시청자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고,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올라가 원조 스타 쉐프라는 수식어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이 시기부터 남자들도 음식 만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후로 TV 요리 프로그램도 하나둘씩 생겨났는데 그중에서도 요리 대결을 펼치는 <마스터 쉐프코리아>같은 프로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것을 기점으로 2012년에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연복, 샘킴, 최현석이라는 스타 쉐프가 탄생했고 남자들이 요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으며 오히려 쉐프가 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훗날 <흑백요리사>라는 요리 대결 프로그램이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 각 대학에는 호텔 조리학과, 또는 글로벌 조리학과 같은 요리학과가 앞다투어 개설되고 많은 중고생이 스타 쉐프를 꿈꾸며 요리학과에 들어가려고 요리학원에 등록해서 구슬땀을 흘렸다. 필자도 흑백요리사를 시청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재밌게 봤다. 이미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지난 필자도 다시 요리 공부를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MZ 세대는 요리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예전에는 남자가 요리할 경우, 적성에 맞거나 아니면 뚜렷하게 할 게 없을 때 식당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배웠다. 단지 필자의 생각이 아닌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요즘도 정년퇴직하거나 군대에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전역하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식당 창업이며 그중에서도 치킨집과 김밥집이 가장 많다. 물론 다른 어떤 요리보다 비교적 만들기 간단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치킨집과 김밥집 외에도 요식업에 많은 사람들이 뛰어드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실제로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연간 요식업 신규 사업자 등록이 13만 114개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다. 1년에 13만 개의 식당이 문을 연 것이고 더 놀라운 것은 식당이 문을 열면 보통 1.5년 후에 폐업한다. 즉 다시 말하자면 오픈하고 2년을 못 가서 폐업한다는 이야기다.이처럼 빨리 문을 닫고 폐업하는 이유는 요리에 관한 지식도 없고 전공도 아닌데도 요리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무턱대고 뛰어들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필자도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한때 공부도 했었고, 창업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하지만 식당을 하려면 우선 자신이 요리를 평생 업(業)으로 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지 또한 그런 체력을 가졌는지 그것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음식 장사를 하면 보통 오픈 준비부터 마감까지 최소한 13시간 이상을 일하며 매일 같이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 주방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더운 여름에 불 앞에서 하루 종일 있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으며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이러한 것을 몸에 익히고 견딘 사람이 식당을 하며 계속해서 장사를 하는 것이지 정년퇴직하고 50-60 나이에 창업하니까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주방장을 채용해서 장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너가 음식을 다루지 못하면 주방장이 문제를 일으키고 속 썩이는 일로 가게가 휘청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뿐만 아니라 장사를 시작하려면 먼저 상권을 분석하고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요리가 그 지역에 적합한지부터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50~60대가 가장 많은 지역에서 피자가게를 한다면 그 가게가 과연 잘 될까? 노인이 많은 지역에서 소갈비 집을 오픈한다면 그 가게가 과연 잘 될까? 게다가 요즘은 트렌드가 너무 빨라서 항상 신메뉴에 대해 준비하고 연구하며 공부해야 한다. 또한 직원 관리, 마케팅 그리고 영업과 전반적인 가게 운영 등등 웬만한 직장 생활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이 음식 장사인데 이것을 그냥 열면 어떻게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잡을 거라고 너무나 쉽게 생각하다가 대부분이 돈만 날리고 다시 직장을 알아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젊은 MZ 세대는 모든 것이 다르다. MZ 세대의 젊은이들은 시작부터 달랐다. 단순히 “할 게 없으니 식당이나 차려 볼까”가 아니고 자신이 꿈을 펼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먼저 파악했다. 물론 예전처럼 도제식 가르침을 받기 위해 유명한 식당에 들어가 마늘이나 양파를 까고 설거지를 하며 밑바닥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더 이른 시일 내에 기술을 배우러 유명 학원에 등록해서 기초를 다지고 그 후에는 대학에 들어가 정통으로 요리를 배운다. 졸업 후에는 유명한 호텔에 들어가서 경력을 쌓거나 해외로 유학하러 가서 유명한 요리학교에 들어가 더 큰 무대를 향해 구슬땀을 흘린다. 이처럼 체계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요식업에 필요한 전반적인 모든 것을 익히고 난 후에 비로소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음식점을 열기 때문에 쉽게 망하거나 문을 닫지 않는 것이다. 젊은 요리사의 놀라운 성과필자도 요리하는 것에 상당히 진심인 사람이라서 요리 관련 뉴스를 자주 보곤 하는데 기성세대는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식당을 차리지만, MZ 세대는 체계적인 요리 수업받고 세계 속에 한식 문화를 알리며 한식의 우수성까지 전하는 큰 일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매우 감탄했으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이들이 더 크게 성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글을 마친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8-31 15:00:11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세계 최고수준의 주거 문화는 한국에 있다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세계 최고수준의 주거 문화는 한국에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갈 무렵을 회상하면서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생활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때는 단독 슬래브 건물에 마당 중앙에 수도꼭지가 있었고 그 옆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 구조의 집에서 뺑 둘러서 다섯 가구가 같이 살았다. 아침만 되면 화장실 앞에서 빨리 나오라고 아우성쳤으며, 정말 급한 사람은 삽을 들고 동네 외진 공터로 뛰어가곤 했었다. 게다가 그때는 단수(斷水)가 왜 그리 자주 됐는지 크고 빨간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물 아껴 쓰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옛일을 떠올리는 정도이지만 당시 80년대에는 흔히 있는 주거 문화였다. 예전에 비해 현재의 주거 문화는 어떤가한국의 주거 문화는 예전에 비하면 놀라울 만한 변화가 있었고 특히 서울 같은 경우에는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믿기 어려운 도시 주거 문화에 큰 변화가 있었다. 여기서 예전이란 40~50년 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불과 2000년대 초반을 보더라도 그 변화는 매우 크다.예를 들자면 건대입구에 있는 더샵 스타시티 주거 복합 건물 같은 경우에는 2003년에 착공하여 2007년에 입주를 시작했는데 포스코건설에서 시공한 58층 규모의 복합 도심형 주거 단지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우선 기존의 아파트와 다른 점이 58층의 웅장한 건물 4개가 마름모처럼 놓여 있고 그 중앙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상에는 차가 들어설 수 없게끔 해 놓고 지하에 대규모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으며 주차장에서 바로 지하철 2호선과 7호선으로 연결해 놓았다. 즉 자기 집 주차장에서 몇 발짝만 걸으면 눈앞에 지하철 개찰구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백화점과 쇼핑물 센터 그리고 극장이 연결되어 있으며 조금 더 걸으면 건국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병원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 즉 쉽게 말해서 밖에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자신이 원한다면 옷에 빗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지하철과 쇼핑센터 극장 그리고 병원과 학교까지 갈 수 있는 최상의 주거 시스템을 조성해 놓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심형 아파트인 것이다. 전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이와 같은 편리한 도심형 아파트는 찾아보기 어렵다. 싱가포르와 일본에도 비슷한 도심형 아파트는 있지만 더샵 스타시티처럼 완벽한 조건의 아파트는 아니다.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이 주거 문화가 발달하고 있는 이유는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악지대이며 그조차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어서 한국은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크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공간 활용이 더욱 발전하게 되고 대규모의 아파트가 급진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때 아파트의 주거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하려고 아파트 주위에 상가가 들어섰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파트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몰리자 아파트 주변에는 쇼핑센터, 병원, 약국, 스포츠센터, 학교 등 여러 가지 생활 문화에 최적화되는 순서를 자연스럽게 거쳐 갔다. 또한 많은 인구가 몰리는 지역에서는 아파트의 가까운 거리에 버스 노선이 생기게 되었고 건설사와 시공사는 아예 지하철이 지나가는 역세권을 중심으로 아파트를 세우게 되자 그 편리함은 한층 더해진 것이고 아파트는 날로 고급스러워지며 편리함도 기대 이상으로 발전했는데 그렇게 해서 더샵 스타시티와 같은 주거 복합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 필자는 여행을 좋아해서 많은 나라를 경험했고 일본에서는 10년, 미국에서도 1년 정도 생활한 경험이 있지만 그 어떤 선진국에서도 한국과 같이 발달하고 편리한 주거 문화가 형성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날로 편리해지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한국의 주거 문화일본인 친구가 한국에 와서 아파트를 경험하고는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스고이=대단해”를 외친다. 물론 일본도 도쿄의 롯폰기 혹은 중심가에 있는 아파트는 매우 고급스럽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20년 전부터 아파트 또는 오피스텔에 냉장고와 에어컨은 기본이고 드럼 세탁기와 전기 인덕션까지 모든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이 기본으로 다 비치되어 있고 붙박이장까지 있어서 몸만 들어가면 되게끔 매우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단순히 한류로 인한 붐으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의 주거 문화에 매료되어 한국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다는 젊은 외국인이 느는 추세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안전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가 주거 문화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외국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 최고의 주거 문화를 선도하는 지역은 부산이 될지도 모른다불과 두 달 전에 필자는 부산의 북항 재개발 홍보관에 다녀왔다. 홍보관 직원이 나와서 약 30분간 북항 재개발에 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고 질의응답까지 마쳤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항만을 정비하는 재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는 근래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규모의 장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항의 재개발은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와 부산항만공사, LH, 부산도시공사, 코레일 등이 서로 협력하여 1, 2, 3단계로 나누어 약 10조 정도의 투자금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해양도시 및 글로벌 허브 도시를 계획하고 있었고 현재 1단계가 진행 중이며 일부는 그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하게 개인이나 민간에서 하는 개발 사업이 아니므로 그 규모가 상당하며 바다를 중심으로 관광, 국제행사 및 업무, 문화콘텐츠, 쇼핑 그리고 호텔까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철도와 항만을 연결하는 해양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주변에 주거하는 시민은 자연스럽게 삶의 질이 매우 높아질 뿐 아니라 모든 편의 제공과 함께 안락한 주거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받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자 내 방에서 커튼을 열면 밖에서는 파도가 치고 노을이 지며 야간에 열리는 불꽃축제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게다가 각종 국제행사가 근거리에서 열리고 오는 길에 바닷가 공원에서 가족들과 산책을 즐기며 쇼핑과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생활이 내 집 앞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차량으로 인한 교통체증이 없이 웬만한 거리를 모노레일로 이동할 수 있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모든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 조성되는 곳이 부산이며 한국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주거 문화는 한국 안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음식 문화, 대중문화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대인기를 얻고 있고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동경하며 한국에서의 생활을 꿈꾸고 있다. 한국의 문화는 앞으로도 인기가 있을 것이고 주거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이광희 문화 칼럼니스트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8-24 14:43:50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이제는 절도가 되는 사라진 서리 문화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이제는 절도가 되는 사라진 서리 문화

    '서리'의 사전적 의미는 곡식이나 과일을 훔쳐 먹는 '장난'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말 그대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장난이다. 물론 장난도 그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될 수 있고 혼이 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인해 처벌받는다거나 실형받는 등 범죄자로 몰리지는 않는다. 필자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배 서리도 해봤고 가을에 잘 익은 밤 같은 경우에는 친구들과 자주 따 먹었던 기억이 있다.그러나 요즘에 예전 기억만 떠올리며 무심코 남의 감이나 사과나 복숭아를 생각 없이 따서 한입 물었다가는 몇 배에서 심지어는 몇십 배를 배상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절도범으로 경찰서까지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2년 전의 일이다. 시골에 땅을 보려 온 사람이 잘 익은 감을 하나 땄는데 같이 온 일행도 대수롭지 않게 하나 땄다가 주인이 보고 신고하여 경찰서로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얼핏 보면 시골 인심이 야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감을 따서 훔쳐 가는 바람에 주인이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외지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감을 땄다가 마침 주인이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있던 일까지 전부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된 것인데, 하지만 멀리서 땅을 보러 처음 왔다는 것이 해명돼서 약간의 배상만 하고 잘 마무리가 된 것으로 기억이 난다.그러므로 요즘에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탐스럽게 익었다고 해서 남의 집 과실을 아무 생각 없이 하나 덥석 잡아서 땄다가는 바로 경찰차에 실려 가는 낭패를 당하고 만다. 그래서 필자가 농작물 관련해서 전국적으로 연간 크고 작은 절도 사건을 조사해 봤는데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연간 약 800건 이상이나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내용이 전부 절도 사건일까?필자가 너무 궁금해서 판례도 찾아보고 자세하게 알아본 결과로는, 지나가다 하나를 따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먹으면 불가벌적 행위로 보고 처벌까지는 가지 않았다. 즉 매우 가벼운 것으로 간주하고 훈방 조치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를 따서 먹고 또 하나를 따서 호주머니나 봉지에 담으면 법적 의미가 완전하게 달라지는데, 이렇게 되면 절도죄(형법 제329조)로 형사 입건이 되어 무조건 경찰 조서를 받는다. 또한 과실을 따는 과정에서 옆에 일행이 같이 동참했거나 혹은 야간에 했을 때는 “특수절도”에 해당하고 게다가 손으로 했는지 아니면 가위나 니퍼 같은 도구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법리적 해석을 완전하게 달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단 한 개라도 남의 것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못 사는 시절에 “서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과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로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너무 많이 가져가거나 과일나무를 상하게 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인심(人心) 쓰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세상살이였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갈수록 흉흉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서리”는 고사하고 주차하는 것 하나 가지고도 서로 언성을 높이고 싸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필자가 서리 문화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올여름에는 유난히 주변에서 자두와 복숭아를 많이 가져다줘서 어렸을 때 서리하던 기억이 떠올라 몇 자 적게 되었다.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살기 좋아진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예전처럼 너그럽게 인심을 쓰며 살아가는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8-17 16:16:57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노인의 시대가 왔다 ... 이제 노인 문화를 모르면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다
    문화/생활

    [이광희의 문화 칼럼] 노인의 시대가 왔다 ... 이제 노인 문화를 모르면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다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가장 낮은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저출산율 1위에 올라 간 것도 제법 됐다. 2018년 이후 통계청에서 발표한 통계이고 그 후 2023년 「인구동향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출산율이 0.72라고 국가 공식 통계로 발표했다. 수치상으로 보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가 싶다가도 실제로 길거리에 나가보면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아서 피부로 실감하게 된다. 또한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떠올려보면 동네 산부인과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고 아기 옷 파는 매장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예전에는 엄마들이 마음 편하게 쇼핑하게끔 대형 쇼핑센터나 백화점에 놀이방을 만들어서 운영했는데 이것도 하나둘씩 철거에 들어가 이제는 없는 곳이 더 많다. 이처럼 출산율이 저조하고 학령 인구가 감소하는 반면에 인간의 평균 수명은 늘어나고 노인이 많아지자 기존과 다른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과거에는 대학에 20대가 주를 이루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최근에는 평생 학습자 전형으로 칠순이 넘은 분들이 대학에 입학을 한다. 노인대학이 아닌 일반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도 하고, 노인을 돌보는 노인학과 또는 노인복지학과, 실버산업학과가 하나둘씩 생겨나는가 하면 한의대에도 노년학이 개설되는 등 점차 사회의 중심이 노년층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사회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고령층의 일자리가 대폭 확대되고 60~70대가 일하는 것도 이제는 흔히 볼 수 있으며, 노인들도 예전과 다르게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쓴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필자가 대학원 석사 때 지도해주셨던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뜬금없이 건강을 위해서 “태극권”을 배우려고 하는데 태극권이라는 운동이 어떠냐고 물으셨다. 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신학과 교수님이 태극권을 하신다기에 의외였지만 적극 추천했다. 왜냐하면 필자가 일본 유학생 시절에 전설적인 대만의 왕수금 노사 계열의 기공 태극권을 약 3년 반 동안 수련한 적이 있었는데 태극권이 겉보기에는 천천히 너무 느리게 하기 때문에 무슨 운동이 되겠느냐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막상 해보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쉽지가 않고 오히려 기혈 순환이 잘 되며 고관절을 포함한 무릎 팔다리 관절에 상당한 운동이 되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다.대상을 노인층으로 바꿀 때가 왔다. 요즘 흔히 100세 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즉 노인 문화의 시대가 접어든 것이다. 물론, 이미 전문가들은 20년 전부터 해 왔던 이야기이고, 일본은 그 이전부터 예상했었다. 하지만 정말 현실로 체감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며칠 전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칠십 초반으로 보이는 분이 경광봉을 들고 학교 앞 스쿨존에서 아이들이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도록 차량 통제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필자가 일을 보고 난 후 다시 그 자리를 지나는데 이미 등교 시간이 지나서인지 한산했고 경광봉을 들고 있던 그분은 경광봉으로 풀 스윙을 하면서 골프 자세를 취하시는데 순간 그 광경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저분 나이 정도면 탑골공원에 가서 내기 장기나 두고 이기면 탁주 한 사발 하시는 게 저 연령대 분들의 소소한 일과였을 것이다. 또한 동네 근처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뜨고 배드민턴을 치는 그런 노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골프라...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노인들의 생활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인인구가 점차 늘고 있는 이 시점에 분명 노인을 상대로 하는 그 무언가를 하지 않으며 이제는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기업도 자영업자도 노인에 관해서 연구해야 하며 무술 도장도 이제는 예전처럼 어린이 혹은 젊은 세대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노인을 겨냥해야 한다. 예를 들어 50세가 넘으면 매년 0.8~1% 정도의 근 손실이 오고 60대가 되면 근력운동을 해도 근육 형성이 쉽지 않다. 게다가 70대부터는 연 3% 이상 근육이 감소하므로 낙상사고가 일어나면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무술 도장은 노년에 할 수 있는 기공체조라든가 혹은 근력운동을 겸한 몸 쓰기 운동과 같은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보다 효율적으로 도장 운영에 도움이 될 것인데 대부분의 도장이 이와 같은 대비가 전혀 없다. 시대보다 앞서가는 것은 힘들지만 뒤처지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서서히 진행되어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이루어 그 변화에 적응하며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면 요즘 사회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새로운 것이 너무나 빠르게 삶 속에 침투하고 그 빠른 변화를 미처 따라가기도 전에 또 새로운 것이 나온다. 어제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서 오랜만에 멀리 다녀왔는데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분이 드론을 띄워서 논에 농약을 살포하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워 한참을 구경했다. 드론은 한 마리 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창공을 날아 뿌연 액체를 연신 힘차게 뿜어댔다. 드론이 농약을 뿌리는 것을 처음 본 필자는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 사회는 이제 우리가 적응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무술연맹의 최고 고문이신 김용신 고문과 오늘 전화 통화한 내용을 끝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78세이신 김용신 고문님은 매일 하루도 무술 수련을 거르지 않으신다. 게다가 생활체육 탁구 시니어부 경북도 대표로 시합에까지 출전하는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 노인 시대가 막을 열었다. 앞으로 노인 문화는 더 큰 비중으로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매김할 것이고 노인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큰 발전과 성공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8-10 16:34:33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시대에 따라 변화는 무술의 유행(流行)
    세계 일반

    [이광희의 문화 칼럼] 시대에 따라 변화는 무술의 유행(流行)

    세상을 살다 보면 그 시대를 풍미하는 것이 있는데, 보편적으로 유행(流行)한다고 말한다. 노래가 유행하면, “유행가”라고 하며 옷이 유행할 때에는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 하고 맛있는 음식이 유행하면 이 음식이 “대세다”라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스포츠나 무술에도 대세가 있고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유행이 있었다. 그러면 무술에 유행 즉 대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보게 되면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일본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에 무술도 일본 무도의 영향을 받아서 가라테(空手道)를 많이 배웠으며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서 당수도(唐手道)로 명칭을 바꾸었고 그 이후에 다시 태수도(跆手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이 훗날 태권도가 된다. 이 외에도 검도와 유도 합기도 등을 많이 수련했다. 이러한 무술은 해방 이후 약 30년간 많은 사람들이 수련했는데 7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홍콩영화가 붐을 타기 시작하여 중국 무술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쿵후 도장이 하나 둘씩 늘어났고 이소룡이 자주 쓰던 쌍절곤을 너도 나도 돌리며 흉내를 내곤 했었는데, 이와 같은 중국 무술의 유행은 약 10년 동안 지속되다가 특공무술과 합기도(合氣道)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러던 중 90년대에 접어들어 장클로드 반담 주연의 「어벤져」라는 킥복싱 영화가 히트하고, 전국의 킥복싱 도장에 킥복싱을 배우려는 회원으로 가득 차서 체육관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90년대 중반에는 해동검도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더니 2000년 초반까지 매우 높은 인지도가 형성되어 전국에 많은 도장이 생겨났는데 당시 해동검도가 최고 정점을 찍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해동검도의 열풍이 조금 가시자, 느닷없이 경호무술이라는 신생 무술이 인기몰이 하기 시작했고, 전국에 경호무술 간판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으며, 서로 자신이 창시자라고 하면서 창시자를 주장하는 사람이 20명이 넘을 정도였는데, 재밌는 것은 무술의 명칭은 같은데 무술 기법이 서로 다 달랐다.다른 나라에 비해서 비교적 한국은 유행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데 무술도 마찬가지였다. 경호무술의 열기가 시들어가자 K-1이라는 입식격투기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고, 대한민국이 떠들썩할 정도로 흥행했는데, 무술이라기 보다는 스포츠에 가까운 K-1은 가라테, 격투기, 킥복싱을 하나로, 입식 최강자를 가린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K-1에 한국 선수들도 많이 출전했으며 이 대회를 통해서 최홍만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탄생하기도 했다.K-1이 성행할 때 필자는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최홍만 선수와 밥샙 선수를 직접 근거리에서 본 적이 있는데 격투기 선수라기 보다는 “잭크와 콩나물”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거인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K-1은 모두를 열광시키는 것 같았으나 그 열기는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런데 K-1 보다도 더 박진감 넘치는 MMA라는 종합격투기 바람이 불더니 10대와 20대는 열광하기 시작했고, 기성세대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K-1 못지않은 인기몰이를 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스포츠나 무술보다 더 실전에 가까웠으며, 심지어는 누워있는 사람도 때리고 발로 밟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본 사람들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종합격투기는 다른 무술이나 스포츠처럼 반짝 인기몰이를 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의 10대 20대의 수련생이 많고 이들은 제2의 김동현 선수를 꿈꾸기도 한다. 또한 다른 운동에도 선한 영향을 주고 있는데, 종합격투기는 타격과 누운 기술 즉 킥과 펀치 그리고 그라운드 기술을 다 섭렵해야 하므로 타격을 베이스로 하는 선수는 레슬링이나 주짓수를 배우며 연습하고 그라운드 기술을 베이스로 하는 선수는 복싱이나 킥복싱을 연습하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운동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왜냐하면 종합격투기 선수들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홍보가 되기 때문이다. 따러서 최근에는 복싱과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배우는 인구가 상당히 늘었고 단순하게 마초가 되기 위한 남자만의 운동이 아닌, 호신술과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한 여성 수련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복싱 같은 경우에는 예전에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복싱 도장에 가면 여성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근래에는 많은 여성이 복싱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며, 또한 시합장에서도 여성 매치를 손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짓수 같은 경우에도 SNS에 도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모습의 여성들이 심심찮게 돌아 다닌다. 그만큼 요즘 젊은 세대는 운동으로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려는 문화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얼마 전 필자가 요식업을 하고 있는 지인과 통화했는데 예전보다 술 마시러 오는 젊은 손님이 많이 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대화 중에 느낀 것은 요즘 젊은 세대들의 소비 패턴이 달라지고 있고 예전보다 더 땀 흘리며 운동하여 체력을 다지고 자기 계발에 힘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건전한 문화가 더 지속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광희 칼럼니스트 기자 yoshinkan_kr@naver.com*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8-03 13:20:08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일본의 닌자(忍者) 그 뿌리를 찾아서....
    생활문화 일반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일본의 닌자(忍者) 그 뿌리를 찾아서....

    닌자는 일본의 상징일까…그 이면에 가려진 역사
    검은 복장에 얼굴을 가린 채 어둠 속을 누비며 표창을 던지는 닌자(忍者). 오늘날 닌자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 가운데 하나다.영화와 드라마, 게임을 통해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존재가 됐고, 일본 관광산업에서도 중요한 브랜드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이 알고 있는 닌자의 모습과 실제 역사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우선 닌자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집단이다. 다만 영화처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전사가 아니라, 첩보와 잠입, 정찰, 교란, 암살 등을 수행하던 특수 임무 수행자에 가까웠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특수부대와 정보요원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조직이었다. '닌자(忍者)'라는 이름에도 그들의 성격이 담겨 있다. 한자 '忍'은 칼날(刃)이 마음(心) 위에 놓인 글자다. 흔히 '참을 인'으로 번역되지만, 단순히 참는다는 의미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든 칼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감정을 억누르고 임무를 수행하는 강한 정신력과 냉철함을 상징한다. 여기에 사람을 뜻하는 '者'가 더해져 닌자가 된다.결국 닌자는 무술보다 정신력과 절제, 은밀함을 우선시했던 존재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닌자가 가장 활약한 시기는 일본 전국시대였다. 수많은 영주들이 전쟁을 벌이던 시대였던 만큼 정보전의 가치도 매우 컸다. 이 과정에서 이가(伊賀)와 고가(甲賀) 닌자는 일본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특히 이가 닌자는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합류해 정보 수집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며 명성을 이어갔다.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전국적인 전쟁이 사라지자 암살보다 경비와 첩보 활동으로 역할이 바뀌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사무라이 제도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이가 닌자를 이끌었던 핫토리 한조(服部半蔵) 가문의 뿌리를 추적하면 백제계 도래인과 연결된다는 연구와 전승이 존재한다. 핫토리(服部) 성씨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 집단에게 부여됐다는 기록이 일부 문헌에서 전해진다. 실제로 일본에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철기, 방직, 토목, 농업 등 다양한 기술을 전파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닌자의 기원이 백제다' 또는 '닌자의 기술이 백제 무술이다'라고 단정할 만큼의 확정적인 역사적 증거는 현재까지는 부족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핫토리 가문의 뿌리와 백제계 도래인의 연관성을 제시하지만, 이것이 곧 닌자 조직 전체의 기원이나 기술 체계를 설명하는 결정적 근거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확실한 사실은 일본의 닌자가 여러 시대를 거치며 지역적 환경과 전쟁 경험 속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닌자의 전술을 살펴보면 정면 승부보다 기습과 위장, 잠입, 함정 설치, 심리전, 정보 수집을 중시했다. 오늘날 군사 용어로 말하면 특수전과 비정규전의 성격이 강했다. 미리 함정을 설치하거나 지형을 이용해 적을 유인하고, 야간 침투와 변장, 은폐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은 현대 특수부대의 작전 개념과도 일부 닮아 있다. 영화에서는 화려한 검술과 공중제비가 강조되지만 실제 닌자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최고의 기술이라고 여겼다.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 돌아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오늘날 일본 미에현 이가 닌자박물관에는 당시 사용했던 무기와 복장, 생활상이 전시돼 있으며, 관광객들은 닌자 시연을 통해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관광 콘텐츠로 소비되는 닌자와 역사 속 닌자는 분명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닌자는 단순한 전설도, 영화 속 영웅도 아니었다. 전쟁의 시대가 만들어낸 정보전 전문가였으며, 그들의 역사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분야다.역사는 한 나라의 상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특히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교류처럼 다양한 기록과 해석이 공존하는 주제일수록 사실과 추정은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만 흥미로운 이야기와 역사적 진실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7-13 14:29:57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서 비롯된 일본의 저력과 단결의 힘. 제 2편, 사무라이의 기개(氣槪)
    세계 일반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서 비롯된 일본의 저력과 단결의 힘. 제 2편, 사무라이의 기개(氣槪)

    - 왜 일본인은 사무라이 정신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필자의 칼럼 제 1편,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사이고우 다카모리는 개혁을 지지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지만, 정부가 사무라이를 그토록 심하게 궁지에 몰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사무라이들에게 주던 봉급을 없애고, 칼도 휴대가 금지되며, 사무라이들은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다카모리는 정부와 심한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고향인 가고시마(鹿児島)로 내려가서 그저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데, 당시 정권을 가진쪽은 혹시 다카모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되어 1877년 가고시마에 있는 무기고를 관리시키려 했다. 이에 참고 있던 사무라이들은 극에 달했고 결국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사무라이라고 해도 기관총과 야포를 운용하는 정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전쟁에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토록 막강한 정부군과 싸우면서도 사무라이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택하며 끝까지 싸웠다는 것이며, 그 선봉에 선 사이고우 다카모리는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이었다.왜 일본인은 사무라이 정신에 그토록 열광하는가?사무라이의 시대가 막을 내린지 149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일본인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사무라이의 정신을 이야기하며 뭔가 힘든 역경을 이겨내려 하고,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하면 다들 정말로 힘을 내서 마치 드라마처럼 그 역경을 이겨내곤 한다. 그러면 왜 일본인은 사무라이 정신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일본 건국 이후에 사무라이처럼 멋있는 기개(氣槪)를 간진 사람이나 집단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강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고 늘 자신의 몸가짐에 흐트러짐 없이 바른 자세와 정신을 함양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려고 한 사람들이며 자기가 모시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며 충성을 다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정신을 최고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인이 최고로 생각하는 문화이자 정신인 사무라이 정신은 백제인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마지막에 약 3만 명에 이르는 사무라이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최후까지 싸운 사람도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 즉 우리의 선조였다. 다시 말해서 사무라이는 시작도 끝도 백제인에 의한 우리 조상의 문화였고 그분들의 얼이 담긴 정신이었는데, 그런데 정작 한국에는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서 아는 이도 없고 그저 일본의 옛날에 있었던 무사도(武士道)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다가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이렇게까지 단절되었을까?한 번 제대로 된 역사와 역사관을 가지고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되찾아야겠다.2011년 145년 만에 프랑스로부터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의 의궤”가 돌아왔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군이 가져갔던 것이다. 물론 외규장각의 의궤는 물질적인 것이고 사무라이의 정신은 내적인 것이지만, 필자는 본질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것에 관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 것을 되찾아서 계승, 발전시켜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이 글을 마친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7-08 15:47:49 이광희 칼럼니스트
  •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서 비롯된 일본인의 저력과 단결된 힘 ... 제 1편, 그 힘의 근본과 출발
    생활문화 일반

    [이광희의 문화 칼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서 비롯된 일본인의 저력과 단결된 힘 ... 제 1편, 그 힘의 근본과 출발

    사무라이 정신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일본은 약 1만4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이 이처럼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그러나 일본은 대규모 자연재해나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놀라울 정도의 질서와 단결력을 보여주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지진과 태풍, 홍수 같은 재난이 반복되지만 신속한 복구와 침착한 대응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아왔다.이러한 일본 사회의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많은 일본인들은 그 근원을 '사무라이 정신'에서 찾는다.사무라이(侍)는 일반적으로 검을 사용하는 무사(武士)를 뜻하지만, 본래는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에서 유래한 말로 '곁에서 모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자신의 명예와 책임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존재였다.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사무라이 문화의 형성 과정에서 백제 도래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대 일본은 철 생산이 부족했던 섬나라였다. 당시 한반도의 백제와 가야는 뛰어난 제철기술과 철기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철기와 제철기술, 무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였다.뿐만 아니라 수경재배를 이용한 벼농사 기술과 건축기술, 기와 제작기술 등 다양한 선진문물이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특히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이후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 불렀으며, 당시 일본 조정은 이들의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적극 활용했다.'일본서기'에는 덴찌 천황이 백제의 고위 관료였던 목소귀자, 답발춘초, 곡나진수 등에게 높은 관직을 부여하고 왜군에게 병법과 전술을 가르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또한 덴찌 천황은 백제인 약 2천 명을 오늘날의 도쿄·요코하마·사이타마 일대로 이주시켜 지역 발전과 행정을 맡겼다고 전해진다.이후 이 지역에서는 일본 최대 무사 세력으로 성장한 미나모토(源氏) 가문이 등장한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동국 지역을 장악했고,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됐다.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백제 도래인들이 일본 무사문화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사무라이 제도의 성립은 일본 내부의 봉건제 발전과 지방 무사세력 성장 등 다양한 역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현재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하다.사무라이는 단순한 전투집단이 아니었다.영주를 보좌하며 영토를 방어하고 세금을 거두었으며 행정과 치안까지 담당했다. 전성기에는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서 핵심 계층으로 자리 잡으며 일본 사회를 이끌었다.무엇보다 사무라이가 오늘날까지 일본 사회에서 특별하게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의 가치관 때문이다.주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책임을 끝까지 다하며, 명예를 생명처럼 여겼다. 수치를 당하면 할복으로 책임을 졌고, 공동체의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언제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단련했다.이러한 정신은 현대 일본에서도 기업문화와 조직문화, 재난 대응 등 여러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가치로 남아 있다.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사무라이 시대도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에도 시대에는 약 260년 동안 큰 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검을 들고 싸우던 사무라이들은 점차 행정관료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무사로서의 본래 기능은 약해졌다.결정적인 변화는 메이지유신이었다.메이지유신은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국가 개혁이었다. 신분제가 사라졌고, 사무라이에게 지급되던 봉급도 폐지됐으며, 칼을 차는 것마저 금지하는 폐도령이 시행됐다.기득권을 잃은 사무라이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정부와 무력 충돌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1877년의 세이난 전쟁이다.흥미로운 점은 이 전쟁을 이끈 인물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는 사실이다.그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새 정부가 사무라이를 해체하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직접 정부군과 맞섰다.결국 그는 전쟁에서 패하며 생을 마감했고, 세이난 전쟁은 일본 역사상 마지막 사무라이 전쟁으로 기록됐다.사무라이라는 신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충성·책임·명예·절제라는 사무라이 정신은 지금도 일본 사회 곳곳에서 하나의 문화적 가치로 이어지고 있다.물론 사무라이 정신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해 책임을 다하고, 맡은 일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자세만큼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아닐까.[2편에 계속]*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7-07 18:43:12 이광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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