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한글날을 맞았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의 첫 이름인 ‘가갸날’이 생긴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백성의 뜻을 글로 옮기려 했던 세종의 마음과,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도 우리 말글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뜻이 한날에 포개진다.
한글의 시작에는 사람의 답답함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어도 글로 나타내기 어려웠던 백성들, 억울한 사정을 전하려 해도 문자 앞에서 주저해야 했던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었다. 세종은 1443년 새 문자를 만들었고, 1446년에는 그 목적과 원리, 쓰임을 설명한 『훈민정음』을 펴냈다. 한글날은 이 반포를 기념한다.
처음 만들어진 글자는 스물여덟 자였다. 기본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기본 모음은 하늘과 땅, 사람을 상징하는 형태에서 출발했다. 단순한 모양 속에 소리의 질서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함께 들어 있었다. 글자를 배우는 수고를 덜어 누구나 자기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려는 설계였다.
그 뜻은 오늘의 생활에서도 이어진다. 어린아이가 연필을 꼭 쥐고 처음 적는 이름, 부모에게 보내는 안부, 일터에서 주고받는 짧은 메모가 모두 한글의 쓰임이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머물던 생각은 글자가 되는 순간 다른 사람에게 건너간다. 말은 지나가지만 글은 남아, 시간이 흐른 뒤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다시 만나게 한다.
한글을 기념하는 날이 처음부터 10월 9일이었던 것은 아니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가 중심이 돼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당시에는 실록 기록을 바탕으로 음력 9월 29일을 기념일로 삼았고, 이름은 ‘가갸날’이었다. 한글을 익힐 때 되풀이하던 ‘가갸거겨’의 첫 두 글자가 기념일의 이름이 됐다.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불렸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 우리 글자를 기념하는 일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한글은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였고, 다음 세대에게 삶의 기억을 전하는 그릇이었다. 가갸날은 익숙한 글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이면서, 우리 말글을 함께 지켜 가겠다는 약속의 자리이기도 했다.
기념일은 이후 양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10월 29일과 28일을 거쳤다. 오늘의 날짜가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은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정인지의 글에 적힌 ‘9월 상한’, 곧 음력 9월 초순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그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0월 9일이다. 오래된 책 한 권이 우리가 글자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을 다시 알려준 셈이다.
한글날은 2005년 국경일로 지정됐고, 2013년부터 다시 공휴일이 됐다. 달력의 붉은 숫자에는 글자를 만든 역사와 그 글자를 지켜 온 시간이 함께 담겨 있다.
오늘날 한글은 국경 밖에서도 새로운 만남을 만든다. 한국의 노래와 드라마에 관심을 갖던 사람이 글자를 익히고, 자막으로 접했던 말을 직접 읽으며,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한국어로 적는다. 화면 속 문화를 바라보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문화를 이루는 말과 글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확산을 보여 주는 공식 지표 가운데 하나가 세종학당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6월 30일 올해 세종학당 29개소를 새로 지정해 전 세계 89개국 273개소로 확대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는 교육 거점이 여러 대륙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어라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이를 적는 문자인 한글도 함께 세계인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해외 학습 현장에서는 한글로 읽고 쓰는 활동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종학당재단이 올해 공개한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 소식에 따르면, 지난 2월 자카르타에서 열린 한국어 뉴스 낭독 대회 결선에 21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직접 한국어 뉴스 원고를 구성하고, 프롬프터를 보며 내용을 전달했다. 다른 나라의 소식을 우리말로 정리하고 한글로 읽어 내는 장면이다.
낯선 글자를 익힌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문 하나를 여는 일이다. 처음에는 모양을 따라 쓰고, 다음에는 소리를 붙이며, 어느 순간부터는 그 글자로 자신을 설명한다. 한국의 문화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전하는 능력으로 자라나는 과정에서 한글은 배움의 도구이자 표현의 공간이 된다.
한글의 국제적 위상에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문자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쓰이도록 설계됐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 인류가 함께 보존할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은 옛 책과 여러 나라의 교실에서 펼쳐지는 새 공책은 서로 먼 듯 가까이 이어져 있다. 앞의 책에는 글자를 만든 뜻이 담겼고, 뒤의 공책에는 그 글자로 새롭게 쓰이는 삶이 담긴다. 한글의 세계화는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살아 움직인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돌아보는 전시도 마련됐다. 국립한글박물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은 기획특별전 ‘일구이륙 무한이륙’을 지난 10월 2일 개막했다. 내년 2월 9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주제관에서 이어지는 전시는 가갸날의 탄생과 한글 학습의 역사, 한글날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본다.
전시가 돌아보는 지난 100년은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쓰는 글자를 새삼 바라보게 한다. 누군가는 이 글자를 지키기 위해 애썼고, 누군가는 뒤늦게 배워 자기 이름을 적었으며, 또 누군가는 먼 나라에서 처음 만난 글자로 새로운 꿈을 써 내려간다.
한글의 위상은 교육기관의 숫자와 문화유산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오늘 우리가 쓰는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어려운 설명을 쉽게 풀어 주는 안내문,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 서로 다른 생각을 차분히 나누는 글 속에서 세종의 뜻은 계속 현재형이 된다.
580년 전 백성의 마음을 담기 위해 마련된 글자가 이제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잇는다. 가갸날이 시작된 지 꼭 한 세기, 한글의 다음 이야기는 오늘도 쓰이고 있다. 누군가의 공책 첫 장에서, 휴대전화의 작은 화면에서, 안부를 묻는 다정한 한 문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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