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환경= 안상석 기자]장당 100~200원대에 불과한 초저가 중국산 태극기가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국내 태극기 제조업계가 존립 위기에 놓였다.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는 문화가 예전보다 줄어든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수입 제품까지 늘어나면서 국내 생산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부터 국내에서 생산된 태극기를 우선 구매하도록 하는 입법이 추진된다.
나경원 의원은 15일 제81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이 태극기를 구매할 경우 국내에서 핵심 제조 공정을 거친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국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태극기도 ‘가격 전쟁’… 국내 제조업체 손에 꼽을 정도
국내 태극기 제조업계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현재 자체 생산설비를 갖추고 태극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국내 업체는 전국적으로 3~5곳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과거 삼일절과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국경일이면 가정마다 태극기를 내걸었고 자연스럽게 민간 구매 수요도 형성됐다. 하지만 공동주택 중심으로 주거환경이 변화하고 국기봉을 설치하지 않는 가정이 늘면서 민간 수요가 크게 줄었다.
여기에 온라인 유통시장을 중심으로 장당 100~200원대의 초저가 수입 태극기까지 등장하면서 국내 제조업체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가격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태극기는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 4괘의 위치, 색상, 크기와 비율 등이 법령상 규격에 맞아야 하는 국가 상징물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일부 저가 제품의 경우 이러한 규격이나 품질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국내 제조업체는 규격을 맞추기 위해 자수와 봉제, 마감 등에 비용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초저가 수입 제품과 동일한 조건에서 가격 경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결국 현재의 가격 경쟁이 지속될 경우 국내 태극기 제조업체가 추가로 문을 닫고, 장기적으로는 태극기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설비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원단까지 100% 국산 아닌 ‘핵심 공정 국내 생산’에 초점
나 의원이 추진하는 개정안은 태극기에 사용되는 원단과 부자재까지 모두 국산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섬유·봉제산업의 현실을 고려해 자수와 봉제 등 제품의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가공 공정을 국내에서 수행한 제품을 국산 태극기로 인정하는 방향이다.
원재료의 완전한 국산화보다는 국내에서 실제 제조가 이뤄지도록 해 최소한의 생산설비와 기술, 인력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수급 차질이나 천재지변 등 불가피한 상황에 대비한 예외 규정도 마련될 예정이다.
특히 개정안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이 매년 국내 태극기 제조업체 현황과 공공기관의 구매 실태 등을 조사해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길 예정이다.
법만 만들어놓고 실제 조달 과정에서는 저가 수입 제품을 구매하는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가 지속적으로 구매 실태를 점검하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나 의원은 “가정에서의 국기 게양이 줄면서 이제 공공기관이 태극기의 가장 중요한 수요처 가운데 하나가 됐다”며 “국경일과 국가 공식 행사에 사용되는 태극기만큼은 우리 손으로 제대로 만든 규격품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 상징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강조했다.
취지는 타당하지만 ‘국산 우선’ 기준은 정교해야
국내 태극기 생산 기반을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 태극기는 일반적인 생활용품이나 행사용 소모품과 달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청사와 지방자치단체, 학교, 공공기관 등에 게양되는 태극기는 가격만으로 구매 여부를 결정하기보다 정확한 규격과 내구성, 색상, 봉제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조달 기준이 필요하다.
공공부문이 일정 수준의 수요를 담당하면 국내 업체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생산물량을 확보할 수 있어 제조설비와 숙련인력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법안이 실제 시행되기까지 따져봐야 할 부분도 있다.
국산 제품 우선구매가 공공조달 비용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적정 가격과 품질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또한 특정 국가의 제품을 사실상 배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경우 WTO 정부조달협정(GPA) 등 국제 통상규범과의 관계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수입산은 안 되고 국산만 구매한다’는 접근보다는 태극기의 규격과 품질, 국내 핵심 제조공정 수행 여부 등을 구체적인 조달 기준으로 만드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공공기관 구매만으로는 한계… 민간시장 회복도 필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내 태극기 제조업체에는 일정 부분 안정적인 판로가 마련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국경일뿐 아니라 각종 국가 행사와 국제행사, 청사 게양, 기념행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태극기를 구매하기 때문이다. 이 시장에서 국내 제조업체가 일정 물량을 확보한다면 최소한의 생산 기반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조달만으로 국내 태극기 산업을 되살리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민간시장에서 국산 태극기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원산지와 제조공정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법정 규격을 제대로 준수한 제품인지 소비자가 확인할 수 있는 품질 인증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산 태극기가 수입 제품보다 비싸더라도 왜 가격 차이가 발생하는지, 어떤 공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소비자가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100원짜리 태극기’가 던지는 질문
태극기를 무조건 국내에서 만들어야 애국이고, 수입 태극기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이번 논의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산이냐 수입산이냐’라는 단순한 이분법보다 대한민국의 국가 상징물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제조 기반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점이다.
한 번 무너진 생산 기반은 다시 복원하기 어렵다. 제조업체가 사라지면 설비뿐 아니라 봉제와 자수, 규격 관리 등에 축적된 숙련 기술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반대로 국산이라는 이유만으로 품질이나 가격을 따지지 않고 공공기관이 구매하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 세금으로 구매하는 만큼 국산 제품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결국 이번 법안의 성패는 ‘국산 우선구매’라는 구호 자체보다 어떤 제품을 국산 태극기로 인정하고, 어느 정도의 품질을 요구하며, 공공기관의 추가 비용을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100원대 태극기가 등장한 시장에서 국내 제조업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는 현실은 태극기 산업이 이미 가격 경쟁만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광복절마다 태극기를 달자는 캠페인을 반복하면서 정작 그 태극기를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는 상황은 한번쯤 되짚어볼 문제다. 이번 법안이 단순한 ‘국산품 보호’를 넘어 국가 상징물의 품질과 국내 제조 기반을 함께 지키는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국회의 논의 과정이 주목된다.
안상석 기자 daily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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