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기획] 자연에 이로운 가을비, 왜 사람만 피해야 하나
- 과학자들 "비 자체는 사람에게도 대체로 무해, 경계할 것은 따로 있다"
[데일리환경=정진욱 기자]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사람들은 단비라 부른다. 갈라진 논밭은 숨을 돌리고, 숲은 잎을 펴고, 말랐던 개울은 다시 소리를 낸다. 그런데 같은 빗방울이 사람의 어깨에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서둘러 우산을 펼친다. 옷이 젖는다는 불편, 감기에 걸릴지 모른다는 걱정을 잠시 내려놓으면 질문은 더 선명해진다. 빗물이라는 물질 자체가 사람의 몸에 해로운가. 본지가 화학·물리·대기과학의 눈으로 따져본 답은 “대체로 아니다”였다. 다만 몇 가지 단서가 붙는다. 산성비 맞으면 머리 빠진다? "비를 맞으면 대머리 된다"는 오래된 속설은 pH 수치 앞에서 힘을 잃는다. 깨끗한 공기 속에서도 빗물에는 이산화탄소가 녹아 약한 탄산이 생긴다. 그래서 산성비의 기준선은 중성(pH 7)이 아니라 pH 5.6에 그어져 있다.국내 빗물은 이 기준선 언저리를 오간다. e-나라지표에 따르면 2022년 한반도 강수의 연평균 pH는 5.9였고, 지역별로는 5.1~7.0 범위였다. 비교의 기준은 사람의 피부다. 건강한 피부 표면은 pH 5 안팎의 약산성 막, 이른바 '산성 보호막'으로 덮여 세균 번식을 억제한다. 빗물은 이보다 오히려 산성이 약하다. 레몬즙은 빗물보다 수소이온 농도가 약 8,000배 높지만, 레몬즙 몇 방울에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탈모의 주된 원인은 유전과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으며, 빗물과의 인과관계는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비는 하늘을 씻어 내린다, 그래서 첫 빗물이 가장 탁하다비가 그친 뒤 하늘이 유난히 맑은 것은 빗방울이 대기를 씻어내기 때문이다. 구름 속에서는 미세입자가 물방울의 씨앗이 되고, 떨어지는 동안에는 빗방울이 공기 중 먼지와 가스를 붙잡는다. 기상학에서는 이를 세정(洗淨) 효과라 부른다.이 원리는 사람에게 한 가지 실용적 조언을 남긴다. 오염물질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직후에 가장 많이 쓸려 내려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빗물은 깨끗해진다. 김해 지역 강수를 분석한 국내 연구에서도 오염 성분 농도는 초기 강우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제주 배경지역에서 6년간 모은 빗물 시료는 약 36%가 순수한 빗물 수준이었다.다만 비가 모든 먼지를 똑같이 씻어내지는 못한다. 굵은 먼지는 잘 붙잡히지만, 지름 0.1~1μm 안팎의 아주 작은 입자는 빗방울 주위의 공기 흐름을 타고 빠져나가기 쉽다. 비 온 뒤 초미세먼지 수치가 기대만큼 떨어지지 않는 날이 있는 이유다.2km 상공에서 떨어져도 아프지 않은 이유, 공기 저항비구름은 흔히 지상 1~2km 높이에 걸려 있다. 공기가 없다면 2km에서 자유낙하한 물체는 초속 198m, 시속 700km가 넘는 속도로 땅에 닿는다. 빗방울이 그러지 않는 것은 공기 저항이 중력과 균형을 이루는 '종단속도'에서 가속이 멈추기 때문이다. 큰 빗방울은 눈물 모양이 아니라 아랫면이 납작한 빵 모양으로 눌리고, 일정 크기를 넘으면 공기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쪼개진다. 그래서 빗방울에는 사실상 속도의 상한이 있다.가장 큰 빗방울(지름 5mm)의 질량은 약 0.065g, 땅에 닿을 때의 운동에너지는 약 0.003J이다. 5g짜리 연필을 5cm 높이에서 손등에 떨어뜨린 정도다. 폭우 속에서 눈을 뜬기 어렵고 따끔하다는 느낌은 들어도, 빗방울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못한다.빗물 속 새 손님들, 마시면 곤란하지만, 맞는 것은 별개현대의 비에는 산업화가 남긴 흔적도 섞여 있다. 스톡홀름대·취리히연방공대 연구진은 2022년, 남극과 티베트 고원을 포함해 지구 어디에서나 빗물 속 '영원한 화학물질' PFAS(과불화화합물) 농도가 미국 환경보호청의 식수 권고치를 넘는다고 발표했다(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 보도). 외딴 두 지역도 권고치의 약 14배였다. 대기 중 플라스틱 섬유가 빗물에 섞여 내린다는 관측도 여러 나라에서 보고됐다.하지만 이 기준은 어디까지나 '마시는 물'에 대한 것이다. AFP 보도에 따르면 PFAS는 주로 음식과 물을 통해 몸에 들어와 쌓이고, 비가 잠시 스친 피부를 통해 흡수되는 양은 이에 비해 미미하다. 연구를 이끈 이언 커즐스 교수 스스로도 인체의 PFAS 농도는 지난 20년간 오히려 크게 줄었다고 덧붙였다.정리하면 빗물은 정수 없이 받아 마시기에는 권할 만한 물이 아니다. 그러나 피부에 잠깐 맞는 것을 건강 위험으로 보기는 어렵다. '마시는 문제'와 '맞는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진짜 위험은 빗방울이 아니라 하늘의 다른 손님과학자들이 비 오는 날 실제로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비와 함께 오는 현상이다. 첫째는 낙뢰다. 천둥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우면 번개가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둘째는 우박이다. 지름 5cm 우박은 초속 30m 안팎으로 떨어져, 가장 큰 빗방울보다 만 배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실어 나른다.비는 애초에 사람을 피해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피부보다 덜 시고, 연필 한 자루보다 가볍게 떨어지며, 내리는 동안 스스로 하늘을 씻어낸다. 굳이 한 가지를 기억한다면, 막 내리기 시작한 첫 빗줄기만 잠시 피하면 된다. 그 뒤의 비는 논밭과 숲에 내리는 비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