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아프리카·동남아 전력망 투자 ‘가속기’ 출범
정부 전력망 계획을 투자 가능한 사업으로 연결…정책·금융·사업준비 한데 묶어
IEA “2500GW 이상 계통 접속 대기”…2030년 전력망 투자 50% 확대 필요
[데일리환경=유승철 기자] 유엔이 재생에너지 확대의 최대 병목으로 떠오른 전력망 투자를 앞당기기 위해 ‘글로벌 그리드 가속기(Global Grids Accelerator)’를 출범시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3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정상회의에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우선 지역으로 하는 새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각국 정부와 지역기구가 이미 세운 전력망 계획을 실제 투자와 건설이 가능한 프로젝트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유엔 설명에 따르면 이 가속기는 발전소를 직접 짓거나 별도의 국제금융기관을 새로 만드는 방식이 아니다. 정부가 정한 전력망 우선사업을 중심으로 유엔기구의 정책 전문성, 사업 준비 지원, 개발금융과 민간자본, 실제 건설·운영 역량을 연결하는 조정 플랫폼에 가깝다. Climate Home News도 이번 출범과 함께 별도의 신규 금융기관이나 추가 자금이 발표된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전력망이 새로운 병목으로 떠오른 이유는 재생에너지 설비 증가 속도를 송·배전망 확충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Electricity 2026’에 따르면 재생에너지와 에너지저장장치, 대규모 전력수요 사업을 합쳐 세계적으로 2500GW 이상이 계통 접속 대기열에 묶여 있다. 신규 송전망은 계획부터 허가와 건설까지 5~15년이 걸릴 수 있지만 태양광·풍력 발전소는 통상 1~5년이면 건설할 수 있어 속도 차이가 커지고 있다.투자 규모도 문제다. IEA는 현재 연간 약 4000억달러 수준인 세계 전력망 투자가 늘어나는 전력수요를 감당하려면 2030년까지 약 50% 확대돼야 한다고 분석한다. 구테흐스 사무총장도 지난 6월 세계가 2040년까지 8000만km가 넘는 전력망을 새로 구축하거나 개보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양광과 풍력 설비를 늘려도 전기를 소비지까지 보낼 망이 없으면 출력제한이 커지고 투자 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아프리카에서는 기존 ‘미션 300(Mission 300)’과의 연계가 중요한 축이 된다. 세계은행과 아프리카개발은행이 주도하는 이 사업은 2030년까지 아프리카 주민 3억명에게 새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계은행은 지난 6월 미션 300을 통해 40개국에서 5000만명 이상이 전력 접근성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그리드 가속기는 이런 국가별 에너지계획 가운데 송전망 확충과 국가 간 전력연계 사업을 투자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맡게 된다.동남아시아에서는 ‘아세안 전력망(ASEAN Power Grid)’이 주요 연결고리다. 아세안에너지센터는 올해 5월 국가 간 전력망 연결에 필요한 최소 기술기준을 담은 보고서를 내고, 서로 다른 국가의 전력망을 단계적으로 연결해 다자간 전력거래와 재생에너지 통합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글로벌 그리드 가속기는 이런 기존 지역계획을 대체하기보다 금융기관과 투자자, 전력회사를 연결해 실행 속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전력망 투자는 발전사업보다 초기 투자비가 크고 회수기간이 긴 데다 인허가와 토지, 규제기관, 전력회사 등 이해관계자가 많아 사업 준비가 늦어지기 쉽다. 반면 송전망이 충분히 갖춰지면 지역별로 남는 재생전력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국가 간 전력거래를 확대할 수 있어 전력공급 안정성과 에너지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낮아져도 계통이 부족하면 값싼 전기를 실제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에너지전환의 초점이 발전설비에서 전력망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이번 이니셔티브의 성과는 발표 자체보다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는지에 달려 있다. 앞으로 어떤 국가와 전력망 사업이 우선 대상으로 선정되는지, 개발은행과 민간자본이 어느 규모로 참여하는지, 인허가와 사업 준비기간을 얼마나 줄이는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 재생에너지 2500GW 이상이 계통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발전소를 더 짓는 것만으로는 에너지전환 속도를 높이기 어렵다. 유엔의 새 가속기가 ‘계획된 전력망’을 ‘건설되는 전력망’으로 바꾸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금융비용과 사업 준비 역량까지 전력망 건설 속도를 좌우하는 만큼, 초기 프로젝트 발굴부터 금융종결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실질적인 성과 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